그 축복 같은 불편을 후회하십니까?
당신은 엑스세대입니까?
인터넷 없이 자란 마지막 세대이면서, 디지털이라는 낯선 대륙에 가장 먼저 발을 올린 세대. 골목에서 뛰어놀다가 가로등이 켜지면 집으로 돌아왔고, 모르는 것이 생기면 검색보다 먼저 몸으로 부딪혔던 세대. 친절한 설명서도 없었고, 정답을 곧장 건네주는 화면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헤맸고, 자주 틀렸고, 별수 없이 다시 해보는 쪽을 택해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불편이었다기보다 훈련에 가까웠다. 세상은 불친절했고, 우리는 생각보다 일찍 단단해졌다.
엑스세대의 어린 시절은 대체로 화면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었다.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고, 땅따먹기를 하고, 공 하나만 있어도 저녁이 올 때까지 놀 수 있었다. 해가 기울면 집으로 들어와 가족들과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았고, 과자를 먹고, 음료를 마셨다. 주말이면 도시락을 싸서 공원으로 갔고, 여름이면 강가나 계곡으로 향했다. 늦게 귀가한 아버지가 머리맡에 과자 두 봉지를 두고 가던 밤 같은 것은 지금 와서 보면 사소한 풍경에 불과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장면이 사람 안에 오래 남는다. 인생을 지탱하는 기억은 대개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생활의 파편들이다.
우리를 키운 것은 종종 사랑보다 습관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잘 모르면서도 좋아했던 것들이 있었다. 팩스모뎀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그 말이 괜히 좋았다. 단어만으로도 어딘가 먼 미래가 스며 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 몰래 전화선을 연결하고, 기계가 내뱉는 거친 접속음을 들으며 다른 세계로 넘어가던 밤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느렸고, 자주 끊겼고, 요금 고지서 앞에서는 대개 낭만보다 현실이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의 연결은 이상하리만큼 찬란했다. 우리는 무엇에 접속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 사는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화면은 조잡했고 인터페이스는 투박했지만, 상상은 그 반대로 과잉이었다. 엑스세대는 그 초라한 기술의 틈새로 처음 세계의 뒷면을 들여다본 세대였다.
그 시절엔 느린 것이 오히려 더 멀리 데려다주었다.
부모님 몰래 밤새 듣던 라디오도 있었다. 새벽은 이상할 만큼 솔직한 시간이었고, 라디오의 목소리는 집 안의 누구보다 더 은밀하게 마음 가까이 들어왔다. 사연을 보내면 읽어주길 바랐고, 매번 보내도 읽히지 않는 문장을 혼자 끌어안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대단한 좌절도 아니었다. 다만 세상은 늘 내 순서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배우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보냈다. 읽히지 않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계속 문장을 적어 보냈다. 어쩌면 엑스세대의 어떤 끈질김은 그런 데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는 것에 마음을 보내는 버릇. 반응이 없다고 해서 곧장 포기하지 않는 묘한 습성.
기다림은 그때, 하나의 생활방식이었다.
설렘 가득한 공중전화의 시간들도 있었다. 주머니 속 동전을 몇 번이나 만져보고, 짧은 통화음 하나에 괜히 심장이 먼저 반응하던 시절. 누군가의 집으로 전화를 걸면 본인이 아닌 다른 가족이 받았고, 그래서 목소리 하나에도 예의와 긴장과 망설임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처럼 연락이 넘쳐흐르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 번의 통화와 한 줄의 메시지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감정이 들어 있었다. 기다린다는 것, 용기를 낸다는 것, 한마디를 하기 위해 망설인다는 것. 엑스세대는 그런 아날로그적 감정을 몸으로 먼저 익힌 세대다. 연락은 느렸지만 감정은 더 짙었다.
우리는 쉽게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결을 더 무겁게 여겼다.
그 시절 우리의 감수성을 길러준 것들도 있었다. 제이팝과 일본 게임, 일본 애니메이션, 그리고 어떤 영화의 빛. 시네마천국을 보며 성장기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안다. 사라지는 것들이 왜 그렇게 선명해지는지, 지나간 시간이 왜 뒤늦게 아름다워지는지, 이미 끝난 장면이 왜 살아 있는 현재보다 더 뜨겁게 남는지. 우리는 그 영화를 단지 감상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정서의 기류 위에서 얼마간 성장했다. 그래서 엑스세대는 설명보다 여운을 믿고, 정보보다 분위기를 오래 기억한다.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을 완전히 폐기하지 못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실용적이었지만, 끝내 건조한 인간이 되지는 못했다.
엑스세대의 장점은 분명하다. 이 세대는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던 시간을 살았다. 튜토리얼은 없었고, 검색은 없었고, 무엇이든 직접 만져보고 틀려보고 다시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가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든 다시 건드려야 했고, 기계가 고장 나면 뜯어보거나 물어보거나 결국 몸으로 익혀야 했다. 그래서 엑스세대는 대체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강하다. 웬만한 변수 앞에서 쉽게 겁먹지 않고, 한 번 막혔다고 해서 곧장 무너지지 않는다. 누가 손뼉 쳐주지 않아도 자기 몫을 하는 법을 안다. 좋아요나 조회수로 자존감을 증명해야 했던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대의 자신감은 대개 외부 반응에서 생기지 않는다. 반복된 실패와 반복된 해결 끝에 남은, 무뚝뚝하지만 단단한 형태의 자신감이다.
우리는 자주 서툴렀지만,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또 엑스세대는 기이한 축복을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20세기와 21세기를 둘 다 통과했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다시 AI 시대로 넘어가는 급격한 변환의 시간을 자기 생애 안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문명의 포맷 변경을 연속으로 목격한 세대. 구슬치기와 땅따먹기를 하며 놀던 아이가, 이제는 코드를 짜고 디자인을 하고, 필름이 아닌 디지털 사진으로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손에 흙을 묻히던 아이가 지금은 키보드를 두드리고, 셔터를 누르던 감각은 필름통 대신 메모리카드 속으로 옮겨갔다.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고, 그 변화의 속도는 때로 사람의 감정보다 앞서 달렸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다. 낡은 감각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채, 새로운 언어를 익히면서.
어쩌면 우리는 두 개의 세기가 아니라, 여러 개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마지막 엑스세대라는 사실을 축복처럼 생각한다. 불편함을 알아서 편리함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고, 기다림을 알아서 속도를 무조건 숭배하지 않으며, 아날로그의 질감을 기억해서 디지털의 무균질함을 조금은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테이프가 늘어지는 순간을 알고, 사진 한 장을 현상해 받아보던 시간을 알고, 전화선 하나에 밤이 걸려 있던 시절을 안다. 동시에 우리는 코드를 짜고, 디자인을 하고, 디지털 사진으로 하루를 기록하고, 이제 AI와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과거에 머무는 세대가 아니라, 과거를 몸에 지닌 채 미래로 넘어가는 세대. 그것은 생각보다 희귀한 감각이다.
하지만 장점은 늘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 엑스세대의 단점은 대개 그 단단함의 반대편에 있다. 너무 오래 스스로 해결해 온 탓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에 서툴고, 너무 오래 버텨온 탓에 자기 피로를 늦게 알아차린다. 괜찮지 않으면서도 괜찮다고 말하고, 아프면서도 이 정도는 견딜 만하다고 넘기고, 상처를 설명하기보다 그냥 삼켜버리는 경우가 많다. 감정을 세세하게 꺼내놓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다. 강해서가 아니라, 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엑스세대는 종종 멀쩡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오래 닳아 있다.
버티는 데 익숙한 사람은 대개 자기 파손에 둔감하다.
금이 가는 줄도 모르고 견디다가, 한참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오래 파손되어 왔는지 알아차린다. 그것이 이 세대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그리고 엑스세대는 늘 중간에 서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윗세대의 질서를 알고, 아랫세대의 속도에도 적응했지만, 정작 양쪽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는 못한다. 전통을 이해하지만 복종하지는 않고, 변화를 받아들이지만 무조건 숭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연결자이면서도 이방인이 되는 묘한 위치에 놓인다. 조직에서는 실무와 책임을 떠안고, 사회에서는 중심을 지탱하고, 집에서는 버팀목이 되지만, 정작 자기 세대의 감정은 자주 후순위로 밀려난다. 많이 겪었지만 많이 말하지 않은 세대. 누구보다 전환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늘 약간 비껴 서 있던 세대. 엑스세대의 고독은 아마 거기서 온다. 소외라기보다 비가시성. 분명 존재하지만 자주 설명되지 않는 상태.
그럼에도 나는 이 세대를 후회하고 싶지 않다. 불완전한 것도 많았고, 거칠고 무심한 장면도 많았으며,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사람 냄새가 있었고, 기다림이 있었고, 서툴지만 진심이 있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살아 있었고, 불편했지만 생생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세계가 급격히 바뀌는 장면을 그저 구경한 것이 아니라, 그 변화 속을 직접 걸어왔다. 손으로 만지던 시대와 화면으로 넘기던 시대를 모두 살았고, 이제는 인간의 지능 일부를 바깥으로 꺼내 쓰는 시대 앞에까지 와 있다. 그런 시간을 한 생애 안에서 통과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축복이기도 하다.
나는 마지막 엑스세대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근사한 이력이다.
엑스세대인 사람에게 이 글이 작은 공감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분명한 결을 가진 세대였다는 것을 잠깐이라도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고 엑스세대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런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덜 친절한 시대를 살았지만, 그 안에서 자기 손으로 삶을 조립하고, 관계를 견디고, 변화에 적응해 온 세대가 있었다는 것을. 소리 없이 강했고, 조용히 닳았고, 쉽게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질량을 가지고 살아온 세대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엑스세대입니까?
그렇다면, 그 축복 같은 불편을 후회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