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처럼 본다. 스타벅스를 본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익숙한 영역이라서

by 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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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나는 카페를 고를 때 모험을 끊었다.


새롭고 감각적인 공간이 많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요즘 카페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취향의 표면을 연마하는지도 안다. 그런데 막상 잠깐 앉아 일을 하거나 글을 쓰려할 때면 결국 다시 익숙한 곳으로 발길이 접힌다. 그리고 그 익숙한 목록의 중심에는 늘 스타벅스가 있다. 이상한 일이다. 특별히 숭배하는 것도 아닌데 자주 가게 되는 곳.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왜 좋은지 묻는다면 잠깐 대답이 미끄러지는 곳. 생각해 보면 이유는 몇 가지쯤 꺼낼 수 있다. 한결같은 커피 맛, 넓은 공간, 덜 눈치 보이는 분위기, 편한 주차, 익숙한 위치. 그런데 그런 항목들을 늘어놓고 있으면 금세 시체 해부처럼 된다. 살아 있는 감각은 사라지고, 남는 건 부위의 명칭뿐이다. 정작 내가 설명하려는 것은 장점의 목록이 아니라, 그 공간 안에 들어섰을 때 몸의 표면이 먼저 풀리는 이상한 안심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은 강릉이다.

커피의 도시라는 말이 너무 많이 소모돼 이제는 거의 관광용 배경음처럼 들리는 곳. 이곳에는 카페가 많다. 저마다 다른 취향과 다른 조도와 다른 음악과 다른 잔의 곡률을 내세운다. 어떤 곳은 지나치게 잘 꾸며져 있고, 어떤 곳은 힘을 뺀 척하는 데에 더 많은 힘을 들인다. 좋은 카페는 정말 많다. 하지만 좋은 카페가 곧 오래 머물 수 있는 카페라는 뜻은 아니다. 이 도시의 카페들은 종종 너무 예쁘고, 너무 붐비고, 너무 관광지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한 곳에 오래 앉아 차 한잔 마시는 일조차 생각만큼 느긋하지 않다. 의자에 몸을 기대는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다음 손님의 그림자가 미리 의자를 식힌다. 좋은 공간은 많지만, 좋은 공간이 언제나 나를 수용하는 공간은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타벅스가 주는 안락함이 내게는 조금 특별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익숙해서. 감탄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경계 장치를 내리지 않아도 돼서. 내게 스타벅스는 잘 만든 공간이라기보다, 이미 수차례 왕복하며 몸이 외워버린 피난 동선에 가깝다.


카페라는 건 어쩌면 하루에 덧대는 임시 휴전선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쉼이라기보다는 잠깐의 정전.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일상이라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잠시 발목을 빼내는 곳. 사람들의 표정을 흘려보듯 바라보고, 들으려 한 적 없는 대화가 귀에 박막처럼 붙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들과 시간의 방향을 멍하니 보게 되는 곳. 그런 사소한 파편들 속에서 생각은 느슨해지고, 감정은 서서히 침전된다.


나는 카페에서 거창한 영감을 채굴한다고 믿는 쪽은 아니다.

다만 집과 사무실에서는 잘 여과되지 않던 감정이, 그런 어수선한 공간에서는 이상하게도 조금 더 또렷한 침전물을 남긴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그런 휴게소에서, 하루 동안 조금씩 파손된 나를 조용히 주워 담는지도 모른다. 완전히 수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더 망가지지 않게 잠시 금이 간 부분을 눌러 붙이는 식으로. 그러기엔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스타벅스로 가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러 간다기보다, 하루의 내부에 낀 잡음을 빼내고 파손된 마음의 나사를 잠깐 조이는 쪽에 가까웠다.


스타벅스가 좋은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그곳에는 적당한 무질서가 있다.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백색소음, 제각기 흩어져 있는 말소리, 무심히 열리고 닫히는 문, 주문 번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자리를 훑는 시선들, 각자의 리듬대로 시간을 소모하는 풍경. 얼핏 보면 그냥 산만한 장면 같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다. 서로에게 깊이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조용히 보존하는 법. 누군가는 노트북을 열어 업무를 보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잠깐 숨을 고르다 떠난다. 그 풍경 속에 섞여 앉아 있으면 혼자인데도 완전히 혼자인 것 같지는 않다.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고립되지는 않는 거리감. 나는 아마 그 적당한 간격을 좋아하는 것 같다. 너무 가까이 섞이지 않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굳이 말을 걸지 않아도 그들의 하루가 조금씩 시야 안으로 스며드는 상태. 세상은 원래 이런 식으로 보는 편이 더 편하다. 정면으로 맞부딪히기보다 비스듬히, 한가운데를 관통하기보다 가장자리의 음영에서. 어쩌면 내가 스타벅스에서 좋아하는 것은 커피보다도 그런 거리의 설계도인지 모른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 가끔 고양이의 마음을 상상한다.


그건 어쩌면 내가 잠시 고양이가 되는 감각과도 비슷하다.

사람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멀리 물러서지도 않은 채, 자기만의 자리를 정하고 몸을 웅크린 채 세상을 보는 상태. 고양이는 대개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기보다 중심이 보이는 곳에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 내 모습도 어쩌면 그와 비슷하다. 참여하기보다는 관찰하고, 침범하기보다는 머무르고, 섞이기보다는 곁에 있는 방식. 그리고 그 감각의 핵심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여기는 내 영역이라는 감각.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았지만, 적어도 잠시 동안은 내가 몸을 내려놓아도 되는 자리. 내 노트북을 펼쳐도 되고, 내 생각을 흘려놓아도 되고, 내 침묵을 오래 방치해도 되는 자리. 고양이가 낯선 공간에 들어가면 먼저 출구와 사각지대와 자기 몸을 말아 넣을 모서리를 확인하듯, 나 역시 카페에 들어서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덜 마모될 각도를 먼저 찾는다. 어느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의 흐름이 덜 거슬리는지, 어느 정도의 소음이면 오히려 집중이 되는지, 어디쯤 앉아야 지나치게 노출되지도 않고 완전히 고립되지도 않는지. 그런 것을 살피는 일은 취향이 아니라 거의 방어기제에 가깝다.


나는 스타벅스를 좋아한다기보다, 스타벅스 안에서 내가 내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그곳은 내가 감탄하는 장소가 아니라 내가 경계를 풀고 파손된 내면을 잠시 드러내도 무너지지 않는 장소다.


커피 맛도 그렇다. 대단히 특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늘 비슷하다.

지나치게 시지도 않고, 과하게 쓰지도 않은 맛. 적어도 내 입에는 늘 무난하고 정확하다. 그리고 나는 거의 항상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신다. 특별히 대단한 커피가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커피. 결국 내가 원하는 것도 그 정도의 단순함인지 모른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어떤 특별한 한 잔을 기대하지 않는다. 낯선 풍미나 과장된 개성을 찾으러 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익숙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충분하다. 그 한 잔으로 순간을 마감하고, 그 한 잔을 옆에 두고 내 일을 이어간다. 세상에는 특별한 맛이 넘쳐난다. 한 입만 마셔도 자신이 얼마나 희귀한 원두를 다루는지 설명하고 싶어지는 커피들. 그런데 자주 찾게 되는 것은 의외로 나를 놀라게 하지 않는 맛일 때가 있다. 혀를 자극하기보다 하루를 방해하지 않는 맛. 스타벅스의 아이스아메리카노는 내게 딱 그런 종류의 안정감이다.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실패한 선택의 뒷맛을 남기지는 않는다. 때로 사람은 감동보다 예측 가능한 무난함 쪽에서 더 오래 생존한다.


그리고 공간이 넓다. 이것도 꽤 중요하다.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 가면 괜히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더라도, 혼자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하지만 스타벅스에서는 그 마음의 짐이 조금 덜하다. 노트북이나 패드를 꺼내 두고 일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사진을 보정하거나, 그림을 그릴 때도 조금 덜 미안하다. 그게 당연한 권리라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덜 조심스럽게 내 시간을 펼쳐둘 수 있는 분위기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고양이가 자기 몸을 말아 넣을 자리를 고르듯, 나 역시 잠시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구석을 찾는 일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집중은 결국 마음이 아니라 자리에서부터 시작될 때가 있다. 의자가 주는 각도, 테이블의 높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동선, 창이 놓인 방향, 옆자리와의 거리. 감정은 종종 추상적인 단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물리적이다. 나는 아마 생각보다 훨씬 더 몸으로 공간을 판독하는 사람일 것이다.


내 동선 안에 늘 적당한 자리에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스타벅스 말고도 큰 브랜드 카페는 많지만, 적어도 내가 움직이는 길 위에서는 스타벅스가 늘 정확히 있다. 집에서 너무 멀지 않고, 차를 세우기에도 비교적 편하고, 잠깐 들렀다가 다시 움직이기에도 무리가 없다. 누군가는 그럴 거면 집이나 사무실에서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집과 사무실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생각이 굳어 버릴 때가 있다. 그곳에서는 공기조차 이미 나를 다 알고 있다. 반대로 카페는 잠깐 나를 바깥공기 쪽으로 밀어낸다. 좋든 싫든 흘러들어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옷차림,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들, 날씨와 시간의 흐름. 그런 사소한 자극들 속에서 묘하게 활력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고, 문장이 생기고, 미뤄 두었던 업무가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나는 아마 그 작은 진동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창가에 앉아 바깥의 움직임을 오래 바라보듯, 나 역시 그런 풍경 속에서 가만히 내 생각을 움직이게 된다. 세상은 직접 뛰어들어야만 느껴지는 것이 있는 반면, 멀찍이 바라볼 때에만 비로소 형태를 드러내는 것도 있다. 나는 대개 후자 쪽에서 더 많은 것을 건져 올린다.


그리고 아주 현실적인 이유 하나. 화장실이 깨끗하다.

이건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릴지 몰라도, 오래 머물 공간을 고를 때 생각보다 아주 중요하다. 고양이가 화장실의 상태에 민감하듯, 나 역시 그런 부분에서 공간의 신뢰를 먼저 느낀다. 집사가 자주 살피지 않은 화장실을 고양이가 쉽게 찾지 않듯, 몸이 먼저 불편함을 감지하는 공간에는 마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청결하지 않은 화장실 앞에서 고양이가 몸을 사리듯, 사람도 불편한 공간에서는 마음보다 먼저 몸이 경계한다. 스타벅스는 그런 현실적인 부분에서 대체로 큰 실망을 주지 않는다. 결국 몸이 먼저 안심해야 마음도 오래 머물 수 있다. 이건 사소한 기준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람이 어떤 공간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은 늘 이런 식이다. 거창한 콘셉트보다 닳아 있는 손잡이 하나, 물기 없는 세면대 하나,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는 화장실 하나가 훨씬 정확하게 그 공간의 태도를 증명한다. 취향은 말로 꾸밀 수 있지만, 관리와 청결은 숨길 수 없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스타벅스를 이유로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방식과 그 안에서 내가 덜 닳는 방식을 좋아했던 것 같다. 적당히 어수선한 인테리어,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각자 스스로 지키는 독립적인 규칙들, 흘려들어오는 각자의 이야기들. 그 안에 앉아 있으면 나는 커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기 좋은 익명의 시간과 적당한 소음과 적당한 거리감을 함께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내게 스타벅스는 멋진 장소라기보다 반복해서 돌아갈 수 있는 익숙한 영역에 가깝다.


고양이가 자기가 냄새를 묻혀 둔 자리에서 비로소 몸의 긴장을 푸는 것처럼, 나 역시 그곳에서야 조금 늦게 어깨를 내린다. 생각해 보면 내가 원했던 것은 커피 한 잔의 맛보다도, 그렇게 잠시 나를 잃지 않은 채 머물 수 있는 안전한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은 파손된 내가 완전히 복구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더 부서지지는 않게 잠시 버텨내는 임시 수리소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덜 잃어버리러 그곳에 갔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섞이지 못한 날에도,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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