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사람의 일치

나는 이중인격자?

by 허경심
‘책이 좋아 작가의 인생에 관심을 갖는 것은
푸아그라가 좋아 오리에 관심을 갖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마가렛 애트우드




수년 전, 동화를 쓰기 시작한 지 4개월 차 나는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다. 지금 쓰려는 '글과 사람의 일치'라는 구절에서 딱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해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좋은 글을 쓰고 싶은데 현실의 나를 직시하는 순간 양심의 가책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글을 쓰면 쓸수록 현실의 나와 글 속의 나와의 괴리감이 너무 깊이 다가왔다. 내가 가식적인 사람이고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에 몹시도 괴로웠다.


나는 불평, 불만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짜증 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내 기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을 험담하고 다녔다. 배려 따위 몰랐고, 그냥 지금 내가 좋고 편하면 별 생각이 없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 불편할 수 있다는 것,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알았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눈치를 보았다. 그 사람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지만 그것은 사실 나의 이기적인 면을 들킬까봐 그랬다는 걸 알아챘다.


글을 쓰며 난생처음으로 나란 사람을 돌아보았다. 내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서 색안경을 끼고 자신을 비하해서가 아니다. 나는 객관적으로 형편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 면모를 속속들이 알아채는 순간의 그 절망감이란! 그것은 마치 자식을 잃어버리고 수십 년 뒤 찾았는데 온갖 부도덕한 죄를 지어 감옥에서 자식과 상봉한 부모의 심정 같다고 할까. 너무 속상해서 가슴이 타들어 갔다. 내 생에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돌아본 날, 나는 화장실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마구 올라왔다. 나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참 힘들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좋은 글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글을 쓸 수 있을지 불가능해 보여서 슬펐다. 눈물이 잦아들었을 때 당시의 그 느낌을 어떻게도 표현할 수가 없다. 뭔가 영적인 느낌이었다고 할까. 쪼그려 앉아 하얀색 화장실 타일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1년 8월 나는 <어느 날, 나에게 공황장애가 찾아왔습니다> 치유 에세이를 출간했다. 온갖 마음의 병을 달고 살았던 내가 공황장애를 겪은 뒤 본격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법'을 실천하고 치유한 이야기다. 공저로 먼저 쓴 책이 있긴 하지만 온전히 나의 힘으로 쓴 이 책은 첫 책이나 다름없다. 그 첫 책이 예상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다. 책이 나온 뒤 독자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감사하다' 등의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사실 나는 책을 쓰고 난 뒤에도 여전히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또 '글과 사람의 일치'라는 구절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수년 전 화장실에서 나의 실체를 알아차리고 슬퍼하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이제 남의 험담 따위 하지 않고(사실 조금은 한다.), '짜증 나'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매일 감사일기를 쓰고, 새로운 것을 도전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도움을 주며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러나 남편을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고, 엄마를 완전히 사랑하지 못하며, 아이는 학교에서 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남이 잘 되는 모습을 보며 질투가 미친 듯이 올라오기도 했고, 여전히 나 자신을 탓하고 나무라고 미워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괴로웠다. 어떻게 치유 글을 쓴 사람이 이 모양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심리 치유 에세이를 쓴 사람은 평안해야 해.'라는 명제를 만들어 나를 그 안에 가두고 강박을 느꼈다.


나는 왜 늘 나의 글과 내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낄까?


이에 대한 이야기를 밀란 쿤데라가 소설 <이별의 왈츠>에 잘 묘사해 놓았다. 이런저런 미묘한 원인과 상황이 있지만 내가 알게 된 점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에 간략히 소설 속 장면을 정리하면 이렇다. 소설 속에는 우연히 처음 만난 남녀 성인들이 어느 와인 바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미묘하고 육감적인 접촉의 경계를 아슬하게 이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는 세 명, 여자는 두 명이었는데 세 명의 남자는 이 여자들과 어떻게 하면 하룻밤을 함께 보낼 것인가에 대해 골몰했다. 술잔이 비워지고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지자 남자 1이 여자 J에게 선을 넘으며 치근덕 거린다. J가 순간 정신을 차리며 거부하자 남자 2와 3은 그 상황을 재미있어하며 농담을 주고받고 J는 모욕감을 느낀다. J의 진지한 모욕감을 눈치 못 챈 남자 1은 또다시 치근덕 거리는데 그때 마침 J에게 구세주 같은 남자 베르틀레프가 나타난다. 베르틀레프는 그들 앞에서 J는 태양이며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한 마리의 나비와 같다는 말을 한다. 남자 1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과장한다고 하자 베르틀레프가 말한다.


"... 당신은 밑바닥에서만 사니까 그래요!... 당신은 자신 속 추함을 당신 주위에서 발견하기 위해서라면 생명이라도 바칠 겁니다. 그게 당신이 일시적이나마 이 세상과 평화를 누리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왜냐하면 아름다운 세상은 당신을 두렵게 하고, 당신에게 고통을 주고, 당신을 끊임없이 밀쳐 내니까 말입니다. 손톱에 때가 낀 채 예쁜 여자를 자기 곁에 두는 건 얼마나 견디기 힘들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까 우선 여자를 더럽히고 나서 즐겨야겠지. 안 그래요, 선생? 당신이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춰서 다행입니다. 당신 손톱 얘기는 분명 맞을 거예요."


사람은 모든 관계에 있어 그것과 나를 견주어 볼 만한 같은 선상에서 존재하고 싶어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글이든 간에 말이다. 이것이 내가 나의 글과 실제 내가 일치하지 않는 것 같아 괴로워 한 이유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또 있었나 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故최복현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을 수강한 한 수강생이 질문을 했다고 한다.

"작가님, 작가님은 글에서의 모습과 실제 모습이 같나요?"

故최복현 작가님은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글을 쓰는 순간에는 일치합니다."

이보다 더 현명한 답변이 있을까? 그렇다. 우리는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글과 사람이 일치한다. 살다 보면 글에서의 나가 아닌 간사하고 어리석은 나를 마주할 때가 있다. 이제 나는 그럴 때 나의 글과 실제 나의 간극을 느끼며 괴로워하지 않으려 한다. 글을 쓰며 글과 내가 일치하는 순간순간이 모이면 분명 나의 글과 실제 내가 일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쓴 포리스터 카터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백인 문명에 억눌리며 살아도 자신들의 영혼의 풍요를 더욱 중시하는 인디언 조부모 밑에 자란 '작은 나무'의 이야기를 무척이나 감동적으로 썼는데 이후 백인우월주의 KKK단의 핵심 인물이 된다. 글과 사람의 완벽한 불일치다.


고백한다. 나는 심리 치유 에세이를 썼지만 아직도 많은 치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써 내려갈 것이다. 나를 드러낼 것이다. 실제 나 자신과 나의 글을 일치시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