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계속 있었어도, 너 분명 후회했을걸?"
문득 생각나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복이다. 어제는 유독 첫 직장에서 가장 따랐던, 이제는 12년 지기가 된 선배 형이 떠올랐다. 예전처럼 매일 얼굴을 보진 못해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안부를 묻는 사이.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는 여전히 편안했다.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다 나의 요즘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에 회사를 나온 뒤 조금은 긴 휴식기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곧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라는 새로운 무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얘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푸념이 새어 나왔다.
"형,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 이직이나 성장에 목을 맸나 몰라요. 그냥 한 곳에 진득하게 붙어있었으면 지금쯤 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을 텐데."
지나온 선택들에 대한 일종의 후회 섞인 고백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던 형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으로 내 마음을 건드렸다.
"야, 네가 더 잘하려고 그랬던 거지. 자리를 잡고 싶어서 그렇게 도전하며 달려온 거잖아. 네가 만약 여기 계속 있었어도, 분명 도전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을걸? 그리고 여기 계속 있었다고 해서 네가 생각하는 그 자리가 잡힐지 안 잡힐지 그거야 모르는 거지. 그러니까 너 잘한 거야. 이제 앞으로 더 잘하면 되는 거야."
그 순간, 마음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굴러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맞아, 내가 망하려고 그런 선택을 했을 리 없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서, 더 나은 아빠와 남편이 되고 싶어서, 그게 최선의 선택인 줄 알았기에 내린 결정들이었다. 누가 앞날을 다 알고 움직이겠는가. 우리는 그저 매 순간 더 잘해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존재일 뿐인데.
그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 참 가혹했다. 남들에겐 "도전이 아름답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볼 때는 '안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그때 옮기지 말걸', '조금 더 버텨볼걸' 하는 결과론적인 후회들이 밤마다 나를 괴롭히곤 했다. 하지만 형의 말 한마디에 그 모든 이직과 도전의 시간들이 '방황'이 아닌 '지향'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단 한순간도 나태해서 움직인 적이 없었다. 더 뜨겁게 살고 싶어서, 내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서, 내 가족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내디딘 발걸음들이었다.
그 순간, 마음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굴러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나를 믿어주지 못할 때, 누군가가 건네는 "너 잘한 거야"라는 확신은 죽어가던 의지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래, 생각해 보면 안 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더 잘해보려고 한 거였다.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쓴 거였다. 그런 이유라면,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모든 게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진심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이었고, 다행히 그 엔진은 여전히 고장 나지 않았다.
형의 말은 명쾌했다. 우리는 흔히 '가지 않은 길'에 대해 근거 없는 환상을 갖곤 한다. '거기 계속 있었더라면 안정됐겠지'라는 생각 역시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형의 말대로 거기 계속 있었다고 한들, 내가 원하는 자리가 보장되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내 안의 열망을 억누른 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자신을 평생 원망하며 살았을 확률이 훨씬 높다. 결국 나의 모든 도전은 '불안정'을 선택한 게 아니라, '확실한 후회'로부터 도망쳐 '가능성'을 향해 달린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나와 비슷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선택을 자책하며 잠 못 이루는 이들에게 이 얘기를 꼭 전해주고 싶다.
"당신, 그때 그렇게 한 거 정말 잘한 거예요."
당신이 내린 그 수많은 결정들은 결코 바보 같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꿈꿨기에,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냈던 용기 있는 선택들이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실패라 부르겠습니까? 더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 친 그 치열한 시간 자체가 이미 당신의 성실함을 증명하고 있는걸요.
지금 당장 눈앞에 확실한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안 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더 잘해보려고 애썼던 그 마음이 당신을 가장 당신 다운 곳으로 데려다 줄 겁니다.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잘했고, 지금도 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 잘 될 겁니다. 조금이라도 더 잘해보고 싶었던 그 마음이 결국 우리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