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하지 않은 트레킹이었다. 떠나올 때부터 몸에 걸치고 있던 바람막이 재킷과 등산화마저 없었다면 이처럼 무모하게 시작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꿈을 좇는 여행이라며 떠들었지만, 이토록 준비성이 부족한 걸 보니 무작정 도망쳐 나온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산다람쥐처럼 관악산 연주봉에 줄기차게 올랐던 나는 무엇을 찾는 척하며, 무엇을 그토록 피하고 싶었을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기 위해 초입인 나야풀에 들어선다. 우리나라 등산로 어귀가 그렇듯 이곳도 이런저런 트레킹 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가난한 여행자라는 핑계로 내 키의 반이 좀 넘는 기다란 나무 막대 하나를 사는 것으로 트레킹 준비를 마친다. 커다란 배낭은 묵고 있던 숙소에 맡기고 작은 배낭만 메고 걷는데도 벌써 어깨와 무릎이 아파 온다. 가이드도 포터도 없이 홀로 시작한 트레킹이 마음에 부담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드룩, 촘롱, 시누와, 도반, 하루하루 나는 산에 깊이 들어선다.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으로 자애롭게, 차가운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로 엄하게, 산은 나를 품에 안는다. 내 눈앞의 산은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다. 꽤나 높은 곳에 올랐다 생각해도, 고개를 돌리면 까마득하게 높은 봉우리가 언제나 나를 내려다 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그는 무수히 많은 말을 나에게 던진다. 듣지 못하니 답을 할 수 없는 나는 그 앞에서 하염없이 작아진다.
고도 삼천 미터가 넘는 데우랄리에서부터 길은 눈에 묻혀 있다. 몇 번씩 눈에 발이 빠지고 미끄러지는 통에 발목과 무릎에 통증이 심하다. 나무 막대로 눈밭을 푹푹 찌르며 가야 할 길을 찾는 탓에 걸음은 너무나 더디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세찬 고추바람이 몸의 모든 끝을 아리게 한다. 힘겹게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고서야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하늘이 갠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영웅에게처럼, 신이 나를 연단하고 그에 맞는 보상을 해준 느낌이랄까. 그래, 이만하면 되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내일, 어쩌면 다음 여행으로 미루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