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주부 생존기 1편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던 그날 서툴지만, 낯선 땅에 서다

by 하루 한 모금



낯선 땅, 낯선 언어.

그리고 매일, 나 자신과 싸워야 했던 시간들.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던 그날

서툴지만, 낯선 땅에 서다


아이들 영어 교육이 걱정되기 시작한 건,

어느 날 문득이었다.


물론 영어 과외는 계속하고 있었고,

요즘처럼 더 큰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영어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나였기에 아이들을 방학 때마다 비싼 영어 캠프도 보냈지만 기대만큼 큰 발전은 없었다.


TV 속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되면 정말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충격이 나를 덮쳤고

예고 없이 찾아온 변화는

나와 우리 가족을 깊은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오히려 그 혼란 속에서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알던 삶이 전부인 줄 알았다.

집, 아이들, 남편, 동네, 친구들…

모든 게 익숙해서

불편하지 않았고

불안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인해

그 익숙함이 두려움으로 변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숨이 막혔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멈춰 있었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살았을까?


그즈음,

알고 지내던 주변 지인이 이민을 간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말이 마치 낯선 나라에서 부는 바람처럼 강하게

나를 흔들어 놓았다.


나는 영어도 못하고

외국여행도 무서워서 패키지여행만 다니는 힘겨운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는 두려움보다는

간절함과 설렘으로 다가왔다.


무언가를 완전히 바꾸고 싶었다.

아이들의 미래도, 남편의 인생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삶의 의미도.


나는, 아니 우리는

그렇게 낯선 나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해외 주부’라는 새로운 정체성과 마주했다.


현실은 생각보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냉혹했고,

상상보다 더 외로웠으며,

기대보다 더 힘듦을 오래 견뎌야 했다.


하지만 나는 매일

아주 작고 느리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그렇게 살아낸 나의 시간들의 조각이다.


혹시 지금, 이민이라는 막막하고 힘든

낯선 길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조용한 나의 생존기의 한 페이지가

작은 용기가 되어주길 바란다.



1장 | 영어 못하는 주부, 낯선 땅에 서다


비행기 안,

나와 남편은 내내 말이 없었다.


중학생이던 큰아이는

친구들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에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둘째는 영어 캠프를 좋아했기에 외국에 나간다는 것에

들뜬 표정이었다.


창밖에 펼쳐진 하늘은 참 멋졌지만,

내 마음은 그와 반대로 흐릿하고 그저 멍했다.


이게 정말 잘하는 선택일까? 몇 번이고 자문했다.

누군가에겐 멋진 이민일지 몰라도 한편으론

내게는 도망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거라며 지금 우리는 뭔가를 바꾸어야 하는 때라고

나 스스로에게 변명 같은 답을 하면서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알게 되었다.

낯선 땅에서는

모든 것이 나를 밀어낸다는 것을.


마트에 가서 물건 하나 사는 것, 은행에 가서 계좌를 새로 만드는 거 , 아이들 학교등록하는 거 , 살집 찾는 거 등등 모든 것이

전쟁이었다.


무언가를 물어보려다

입도 떼지 못하고 속으로 고민만 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일이 반복됐다.


한국에서는 뭐든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던 내가

이곳에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무력감 속에 매일 갇혀버렸다.


한 번은 아이가 아팠을 때였다.

병원 접수창구 앞에서

아이의 증상을 설명하지 못해

서성이다가 겨우 번역기를 꺼내

서툰 영어로 겨우겨우 설명을 했다.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초라한 내 모습에

그 순간, 눈물이 났다.


아픈 건 아이인데

아픈 사람처럼 보이는 건 나였다.


나는 점점 작아졌고

말수도 줄었다.


낯선 언어보다 더 무서운 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감각.


이민은 새 출발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살아냈다.

아니, 살아내야만 했다.


작은 인사말이라도 용기 내어 건넸다.

‘이 정도는 괜찮아.’

스스로에게 매일 속삭이며

오늘 하루를 넘기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트 계산대에서

직원이 건넨 “How are you? “에

나도 모르게 “Good, thank you. And you? “라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건 내가 해냈다는 감정보다 이 작은 행동이

그동안 얼마나 움츠러들며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유창하게 영어를 하지 못한다.


가끔 버벅거리고

가끔은 그냥 웃음으로 넘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언어는 수단일 뿐,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도

나는 영어를 잘 못 하는 주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주부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같은 외로움과 막막함 속에 있다면

부디 기억해 주세요.


우리는 작지만,

분명히 소중한 하루하루를 매일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