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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아빠 May 07. 2021

결재서류보다 고무장갑이 좋다.

남편주부위 화려한 외출

옷방 헹거에 걸린 옷을 뒤적뒤적. 언제 꺼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쌓여 있다. 컥컥. 에취. 아, 여기 있네. 하, 소매에 곰팡이가. 드라이해서 걸어 둔 것 같은데 곰팡이가 피었네. 예쁜 꽃을 만난 것처럼 기쁘네 아주. 한번 입고 말 건데. 물티슈로 닦자. 쓱쓱. 괜찮네. 내가 정말 좋아하던 옷이 었는데,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다 너. 자주 입을 날 올 거야. 알겠지? 재킷.


배가 더 나온 것 같은데. 살이 쪘는데 맞으려나. 단추가 버텨주겠지. 흠... 이건 괜찮겠지? 일단 입어 볼까. 오, 다행이다. 이건 괜찮네. 잉? 목이 조금 더러운데 안보이겠지 머. 이거 언제 샀더라. 5년 전에 첫 출근할 때 산거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와이셔츠.


오, 뭐야? 이런 게 있었어? 보물을 찾은 느낌이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잘 입지도 않는 옷을 살 뻔했다. 너 언제 샀더라. 뜻밖의 녀석을 만났다. 고마워. 조금 끼지만 괜찮아 한 번이니까. 슬랙스.


너무 촌스러운데, 내가 이런 걸 하고 다녔다고? 아닐 거야. 빌릴까? 아니야. 뉴트로 패션이 대세잖아.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 맨 거라 생각하자. 오랜만이야. 내일은 햇빛 좀 보러 나가자고. 주인이 집에 들어앉자, 너도 옷장에 들어앉아서 햇빛을 볼 날이 없었지? 넥타이.


일부일처제. 구두는 하나뿐이니까. 선택권이 없다.


내일은 막내 처제가 결혼하는 날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차려입는다. 거울 속의 모습이 이제는 어색하다. 내가 이렇게 입고 다닌 적이 있었나. 벌써 2년이나 지났네.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어우 답답해.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목을 조르고 허리띠가 배를 조른다. 재킷이 어깨를 잡는 것 같고 정갈한 슬랙스 라인으로 차렷 자세가 된다. 너무 불편해서 입고 있던 옷을 빨리 벗어 버렸다. 이제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때의 삶도.


고무 바지에 면티가 세상 좋고 편하다. 결재 서류보다 고무장갑이 손에 잘 맞다. 구두 신고 사람들 만나는 것보다, 슬리퍼 신고 쓰레기 버리러 가는 게 재미있다. 분리수거 실패하지 않으리. 직장에서 어떤 일을 기획할까 생각하는 것보다, 오늘 저녁은 어떤 요리로 가족을 맞이할까 생각하는 게 즐겁다. 회사 일로 시장 조사하는 것보다, 마트에서 시장 조사하며 아줌마들 사이를 비집고 빅세일 상품을 집었을 때, 쾌감!!! 오 마이 갓! 타임 세일 시간이다. 지금 마트로 뛰어가자. 사람들 앞에서 프로젝트 발표하는 것보다,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게 훨씬 보람되다.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을 쓰며 씨름하는 것보다, 지금 몇 사람이라도 즐겁게 읽어주는 주부의 삶을 쓰는 게 행복하다. 나는 천상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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