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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아빠 May 12. 2021

믹스 커피가 땡긴다.

아들 소풍 도시락을 만들 때.

아빠, 선생님이 내일 도시락 싸 오래요.


어제 아들이 하원 하면서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뭐?! 정말이야? (유치원에서 필요한 거 이제 아빠한테 말한다. 너도 아빠가 주부라는 거 아니?)

네! 내일 소풍 간다고 도시락이랑 간식 가지고 오라 했어요.

알겠어. 잠시만 가정통신문 확인 좀 해볼게.


가정 통신문에 소풍 준비물로 버젓이 쓰여 있다. 하....

도. 시. 락...?


아들 소풍 가서 뭐 먹을래?

아빠가 만들어주는 꼬마 김밥이요.

알겠어. (제일 손 많이 가는 걸... 다른 건 안 되겠니...?)

그럼 아빠 마트 다시 다녀와야 하니까, 잠깐 이거 보고 있어.


아들이 좋아하는 코코 멜론을 틀어주고 마트로 달려갔다.

단무지와 우엉 세트, 맛살, 햄, 김이랑 어묵은 집에 있고. 계란 없는데, 워매 비싼 거. 욕 나올 뻔. 아, 그래도 계란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계란을 들었다 놨다 들었나 놨다 해~~. 계란 앞을 서성거렸다. 이번 달 생활비가 얼마 남았나 고민되었다. 계란은 다음에. 아들아 괜찮지? 계란 대신 오이랑, 파프리카를 사며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위로한다. 아들이 좋아하니까. 김밥 반찬으로 넣어야지.


만원입니다. 네?! 만원요?!

영수증을 받아 들고,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너무 비효율적인데. 차라리 김밥천국에서 김밥 한 줄 살걸 그랬나. 배 보다 배꼽이 더 큰데. 하... 그냥 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재료 값과 노동력을 고려했을 때, 굉장히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마진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앗, 맞다. 목요일에 아내가 야근한다고 했었는데, 그때 도시락 싸주면 되네. 그래, 그럼 됐어. 웃다가 슬퍼진다. 그런데 또 도시락을...? 그건 목요일에 생각하자...


집으로 가면서, 내 머릿속은 아들 소풍 준비 전략 회의로 바빴다. 내일 아침에 분주하지 않으려면 오늘 저녁에 미리 김밥 재료 손질을 해야겠지? 저녁에 재료를 미리 잘라 놓자. 그럼 아들이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겠네. 김밥 만들려면, 아침에 7시에는 일어나야겠고. 쌀은 자기 전에 미리 불려 놓고, 아침에 쾌속 백미로 하면 되겠다.


우선, 아들을 빨리 재워야 했다. 하필, 아내도 야근이다. 혼자서 후다닥 처리해야 했다. 아들에게 소풍의 기대감을 엄청나게 불어넣었다. 내일 당나귀 탄다는데? 아들, 햄버거 만들기도 하는데? 우와. 동물 먹이주기도 하는데?! 소풍을 기대하는 마음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니까. 아들은 신나서 저녁을 후딱 먹고, 책 몇 권 읽다가 빨리 침대에 누웠다. 좋아, 나쁘지 않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성취감이 느껴지는 건 뭐람.


아들이 깊이 잠든 시간 조용히 불을 켠다. 도마 소리에 아들이 깨면 안 되니까, 안방으로 도마를 들고 들어간다. 딱딱딱. 딱딱딱. 쪼그려 앉아서 칼질을 하려니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다. 일반 김밥은 재료를 채 썰 필요가 없지만, 꼬마김밥은 한 입에 먹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각각의 재료를 채 썰어야 해서 재료 손질이 좀 번거롭다. 우리 아들이 행복해하겠지? 감상에 젖는 건 사치다. 목 뿌라지겠네. 달 밤에 체조도 아이고. 흥분하면 나오는 사투리가 여지없이.


띠리리. 아내가 야근을 마치고 들어왔다.

푸하하하, 오빠 뭐 하는 거야?

아들 도시락 싸야 해.

뭐!? 도시락????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시락 쌀 준비를 마치고 잠들었다.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이제 알람 소리만 잘 듣고 일어나면 돼.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 늦으면 아들 소풍 망치니까. 안 돼. 내 소풍도 아닌데, 내가 긴장하는 건 뭐야. 37세에 소풍 때문에 긴장하다니. 잠이 안 오네. 갑자가 아들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아빠, 쉬 쌌어요.


복병을 만났다. 엄마 좀 깨워, 아빠만 깨우지 말고. 하...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 쉬. 쉬. 쉬.

내일은 좋은 날이잖아. 아들 소풍 가야지. 샤워는 아침에 하고, 얼른 자자. 대충 내복 갈아 입히고 재웠다.


아빠, 쉬 쌌어요.


뭐라고...?! 꿈이겠지? 복병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아주 날을 잡았구먼. 저녁 빨리 먹인다고, 아들이 좋아하는 김치찌개에 말아서 줬더니. 오줌 잔치다. 암모니아 향에 취한다 취해. 몇 시야? 아침 7시.


밥 해야 하는 데. 손과 발이 빨라진다. 예상치 못한 아들의 오줌으로 세탁기부터 돌려야 한다. 가끔 엄마가 집안일이 바쁠 때, 발에 바퀴를 달고 뛴다고 그러셨다. 지금이 그런 상황인가. 나는 빨리 해달라고 엄마를 재촉했었는데. 엄마 많이 힘들었겠다. 엄마 미안해.


미리 불려 둔 쌀을 밥솥에 넣고 쾌속 백미로 밥 짓기를 한다. 밥이 될 동안, 어제 준비한 재료를 볶는다. 한꺼번에 볶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면 김밥 맛이 별로라서 각각 볶는다. 이런 정성까지. 아들, 아빠한테 잘해야 한다. 글 쓰는 이유 다 있어. 에헴. 아빠 노후를 부...?!


쿠쿠, 하세요. 쿠쿠.

재료 조리가 다 될 즈음, 밥이 다 되었다. 나이스! 역시 적절한 타이밍! 계산된 대로 착착! 텐션이 올라간다. 김밥을 잘 말 수 있겠어.


이제 김밥의 맛을 더할 '흥'을 준비한다. 아들 동요, 알파벳 노래는 잠시 쉬어. 오늘 아침은 아빠의 시간. 요리의 맛을 좌우하는 '흥'을 넣어야 맛있다.


쉐킷 쉐킷, 둠칫 둠칫. 갓 잇 겟겟, 어깨를 들썩이며 스텝을 밟아 준다. 멜로디에 몸을 맡기며 위생 장갑을 낀다. 밥을 펴서 식힌다. 밥에 양념을 하지 않는데, 밥 양념은 어려워서 못하겠더라. 시중에 파는 양반김으로 만들면 편하다. 간도 되어 있고, 기름도 발려 있다. 또 적당한 크기라서 아이들이 한 입에 먹기 좋다.



조미김은 잘 찢어지기 때문에, 김에 밥을 펼 때, 살살 펴야 한다. 밥을 펼 때, 흥을 잠깐 멈추고, 손 끝을 세워서 밥알을 살살 밀어준다. 그다음 준비된 속재료를 넣어서 살짝 말아준다. 그런 다음 주먹으로 한 번 움켜쥐면 김밥 완성! 마지막으로 아들이 한 입에 먹기 좋게, 반을 자르면 된다.


요리 프로 나가 봐?! 불러 주는 곳 없지만. 백종원 주부님 저희 친하잖아요. 저는 유튜브에서 매일 만나고 있거든요. 나중에 게스트로 불러 주세요.


유치원 등원 차량 탑승시간이 다가온다. 김밥과 시계를 왔다 갔다 눈이 바쁘다. 손은 김밥을 싸면서 아들 입에 김밥을 밀어 넣느라 바쁘다. 야근하느라 피곤했던 아내도 입을 벌린다. 어미새, 너도 힘들겠다. 짹짹이들 먹이려면 말이야. 그래도 우리 집 짹짹이들은 예뻐. 아주, 예뻐서 괜찮아.


우리 엄마가 이런 마음이었겠지. 엄마 고마워.


짝짝짝!

다음에는 사 먹자. 아빠 꼬마 김밥은 오늘이 마지막. 알겠지? 도시락에 꼬마김밥 정갈하게 넣고 마무리.


엄마도 날 키우면서 이런 마음이었을까. 엄마 보고 싶다. 아, 믹스 커피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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