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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자(字) 타자기로 보는 Ai시대 문서 보안의 역설

인공지능 시대, 다시 부상하는 문서 보안의 첨병 타자기

by 레뜨로핏 Rettrofit
코베이옥션에 올라온 갖은자 타자기. 사진출처: 코베이 옥션


처음 보는 타자기가 나타났다.

지난 9월 17일 코베이 옥션에서는 마감시간까지 32번의 입찰로 치열했던 경매가 한 건 있었다. 매물로 나온 물건은 타자기다. 그런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자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도 낙찰을 꼭 받겠다는 생각으로 경매에 참여했으나, 아쉽게도 차순위자로 낙찰은 받지는 못했다. 타자기 애호가들의 치열한 경쟁을 유발했던 타자기는 바로, 공병우타자기회사에서 제작한 '갖은자(字)' 활자를 가진 타자기이다. 타자기 애호가들 사이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기종이라서 타자기의 정확한 명칭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타자기가 가진 특징과 제작자 이름을 가지고 필자는 편의상 '공병우 갖은자 타자기'라고 부르기로 했다. 옥색 느낌의 키캡과 쌍초점 가이드, 그리고 자판이 왼쪽부터 종성, 중성, 초성 순의 배열인 것을 볼 때, 공병우 타자기의 특징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 타자기는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이 있다. 숫자를 표기하는 활자가 두 가지씩 있다. 하나는 아라비아 숫자이고, 다른 하나는 '갖은자'(갖은字)라고 하는 '한자'로 숫자를 표기하는 활자가 있다. 공병우타자기는 속도타자기를 시작으로 가장 마지막으로 출시했던 공한영 301 타자기까지 지속적으로 자판을 개량하며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세대별로 구분을 할 정도로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는 자판배열이 다양하다. 또한 특정 용도에 특화된 자판의 타자기도 제작했다. 문인들을 위한 '문장용 타자기'라던가, 시각장애인 전용 '점자 타자기' 한글과 영문을 함께 타이핑할 수 있는 '공한영 타자기' 등 특화된 기능을 가진 타자기 보급에도 힘썼다. 이번 경매에 나온 갖은자 타자기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중에 하나였을 것으로 본다.


공적장부 문서보안의 상징 '갖은자'(갖은字)

최첨단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더없이 편리함을 누리고 사는 시대다. 반면 인간의 모든 일상이 디지털화되어 있는 요즘은 해킹의 위협이 가장 큰 위험요소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70년대의 문서 보안체계 일부를 갖은자 타자기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먼 옛날 공문서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담보하는 핵심 요소는 '숫자'였다고 한다. 이유는 위조나 변조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산화 이전 시대의 행정가들은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정교한 아날로그 보안 체계를 발전시켰는데, 그 중심에는 '갖은자(갖은字)'가 있었다. 이는 중국에서 유래가 되었으며, 우리나라는 신라시대 유물에서도 갖은자가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일종의 문서보안 기술의 하나라고 전한다.


갖은자(갖은字)라는 것은, 한자에서 같은 뜻을 지닌 원(原) 글자보다 획을 더 많이 구성하여 보통 쓰는 한자보다 모양과 구성이 전혀 다르게 된 한자를 말한다. 이렇게 획을 더 복잡하게 써서 금전을 다루는 중요한 서류인 공문서, 계약서, 영수증 등에서 금액이나 숫자표기를 할 때 위, 변조를 방지할 목적으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한자의 획이 많아지면 상대적으로 위조가 어렵고, 고쳐도 표가 쉽게 나기 때문이다.


공병우 속도타자기가 처음 나왔을 때에도 들쑥날쑥하는 활자의 크기 때문에 빨랫줄글씨라는 비판과 함께 글자의 위, 변조를 우려했었다. 이런 이유로 특히 정갈한 네모꼴 글씨를 지향하는 공무원 집단에서는 공병우 타자기가 외면받기도 했었다. 글꼴의 심미성을 중시하는 문화도 있었지만, 공문서의 가장 중요한 위, 변조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당시 공무원들에게 공병우 속도타자기는 메리트가 반감되는 기계였을 수도 있다. '한글과 타자기'의 저자이자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김태호 교수는 속도타자기가 받침의 위,변조 문제를 핑게로 관공서에서 외면받는 데 대한 대응으로 공병우 박사가 금융권에 갖은자 타자기 제작을 하신 것이 아닐까? 추측하며, 공병우박사의 자서전에도 갖은자 타자기 제작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전했다.


갖은자 타자기의 금속활자. 출처. 코베이옥션

갖은자가 필요했던 예를 들면, 한자 일‘一’에 세로로 획을 하나 추가해 버리면 십‘十’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금전이 오가는 중요한 문서라면 금액에 큰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일억이 십억으로 위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갖은자의 한자표기는 아래와 같다.


일(一)은 壹, 이(二)는 貳, 삼(三)은 參, 사(四)는 肆, 오(五)는 伍, 육(六)은 陸, 칠(七)은 柒, 팔(八)은 捌, 구(九)는 玖, 십(十)은 拾으로 표기한다. 그 외에도 타자기에는 백百, 천千, 만萬 까지의 활자가 있다. ‘0’ 영(零)의 경우는 실제 금전표기 시 ‘0’을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숫자로 2,090을 한자로 쓰면 貳仟玖拾(이천구십)이라고 썼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갖은자를 1부터 10까지 다 썼으나, 한국에서는 보통 壹일, 貳이, 參삼, 拾 십 정도만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들 외의 숫자는 위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갖은자 타자기는 어디에 사용했던 타자기일까? 앞에 갖은자의 설명에서도 나오듯이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다. 40년 경력의 타자기 수리, 복원 전문가인 안병조 씨는 이 타자기가 과거 은행에 수표발행기가 나오기 전에 수표를 찍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수표발행용 타자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형식은 타자기이지만 사실상 글을 쓰기 위한 목적이 아닌 수표발행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국내 은행에 수표발행기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은행업무 전산화가 시작되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타자기는 1970년대 후반에 수표발행기가 나오기 전까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중고플랫폼에서 판매 중인 갖은자 체크라이터 이미지 갈무리. 출처: https://choice34.thebase. ©rettrofit

수표 발행기와 더불어 '체크라이터'라고 손으로 다이얼을 돌리며 갖은자를 입력할 수 있는 수동식 수표발행기가 나오기 전까지 이 공병우 갖은자 타자기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관련 정보가 없는 것은 대중적으로 활용된 것이 아닌 일부 금융기관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 외에도 증권사 등과 같은 금융권 또는 호적이나 제적등본을 다루던 공공기관, 우체국과 같은 곳에서 이 타자기를 다루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인공지능의 공격으로 정보국에서 문서보안을 위해 타자기로 문서를 만드는 장면 영화 '미션임파서블' 데크레코닝 화면 갈무리. ©rettrofit


갖은자를 이어갈,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보안은 다시 아날로그?

1914년 이원익의 언문타자기를 시작으로 한글 타자기가 개발되고 이용되기 시작하여, 한글타자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어 보급되고, 행정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당시 손원일제독의 의뢰로 공병우박사가 해군에 세 벌식 한글타자기를 처음으로 생산하여 납품했던 1세대 속도타자기가 시작이었다. 이후 김동훈, 장봉선 같은 다른 개발자들의 타자기까지 행정영역에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타자기는 전산화 이전, 근대 한국의 행정 체계에 핵심 사무기기로 활약을 했다. 1980년대 PC가 대중화되기 시작하고 우리의 행정체계도 전산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타자기를 빠른 시간에 사무기기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지나간 역사의 산물로 남아 있었지만, 타자기는 다시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 국가정보관리원의 화재로 디지털정보가 보관된 전산망이 먹통이 되면서 일부 관공서에서는 예전처럼 다시 수기로 행정처리를 하기도 했다. 이를 지켜보며 디지털 정보의 안전성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고, 디저털 정보관리에 새로운 이슈를 던졌다. 뿐만 아니라 국가 또는 산업스파이들의 해킹 그리고 인공지능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생성형 인공지능이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전산망을 교란시키고 국가 주요 기밀정보에 접속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는 이제 영화 속 이야기나 상상력 좋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로 다가오는 문제 중에 하나 일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해킹과 인공지능에 대비한 가장 안전한 보안은 역설적으로 '타자기' 같은 아날로그 방식의 문서 생성 방식이 주목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조상들이 만들어낸 문서보안 기술인 '갖은자'와 같이 첨단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는 새로운 보안방식 또는 시대에 맞는 아날로그 방식의 보안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7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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