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기계화의 길고도 복잡했던 역사를 단 3편으로 정리하기에는 역시 부족했던 것 같다. 톺아보기 3편까지 한글타자기 개발의 시작부터 몰락까지 시간적 흐름에 따라 정리를 해 보았다. 연재 마감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지난주는 일단 발행을 했다.(반성도 했다) 부족했던 부분은 차 후에 보강하기로 하고, 이번 톺아보기(4)에서는 한글기계화와 관련한 세 가지 이슈들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가로 쓰기」와 「세로 쓰기」
2024년 현재. 우리는 일상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 모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 쓰기」 방식으로 한글을 쓴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한자를 병기倂記 하지 않고 한글만 전용으로 「가로 쓰기」를 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공기처럼 너무 당연한 것이니 생각을 할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영역이다. 필자도 '타자기'에 깊게 빠지지 않았다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사실이다. 가로 쓰기는 광복 후 1945년 12월부터가 시작이라고 본다. 한글을 가로로 쓸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대한 사회적 숙의 熟議를 전제로 하였다기보다는 일방적인 지침이 아니었을까? 가로 쓰기가 정해지긴 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1949년 9월 24일 자 동아일보 기사 중에서
바로 방향이다. 『동의보감』이나 『훈민정음해례본』 같은 조선시대 서책을 떠올려보라. 한자를 기반으로 하던 기존의 전통적인 세로 쓰기에서의 방향은 오른쪽에서 왼쪽이다. 때문에 가로 쓰기로 바뀌었지만, 방향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쓰니, 적지 않은 혼동이 생겼다고 한다. 1949년 9월 24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이승만 대통령이 가로 쓰기 혼동으로 '불조심'을 '심조불'로 읽었다는 일화가 나온다. 아래는 신문기사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가로 쓰기 규격통일에 대하여 | 내가 지방에 갔을 때 "심조불"이라고 건물에 대서하여 있기에 저것이 무엇이냐 들었더니 "불조심"이라 쓴 것이라 하였다. 우리의 "가로 쓰기"도 규격을 통일하여 사용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1949년 9월 25일에 정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는 한글 가로 쓰기의 방침을 수립하게 되었다. 보도는 이틀 뒤인 9월 27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경향신문에서 기사를 다루었다.
횡서의 기점은 좌로부터 하라_공보처발표. 1949년 9월 27일 경향신문
정부에서 횡서 기점의 기준을 공식 발표했음에도 민간에서의 문자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어디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일인가?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정부에서 당장 내일부터 오른손잡이는 왼손으로 밥을 먹어야 된다고 법을 바꾸면 따르겠는가? 일본은 1952년 6월에 교과서와 공문서에 횡서 사용을 결정했다는 기사가 났다. 한국은 1967년 11월이 되어서야 공문서의 가로 쓰기가 단행된다. 한글타자기 개발과 한글기계화를 발목 잡았던 한자 병기와 세로 쓰기 문화. 이 두 가지 문제가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당시에 이미 개발된 한글타자기들은 모두 순한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 쓰기를 하고 있었지만, 정부차원에서 글쓰기 방식과 문화를 바꾸겠다고 한 것에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몸에 배어 있는 습관처럼 글쓰기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에 정부도 1970년까지 단계적으로 적용하겠다는 발표가 난다. 정부에서 선도적으로 순한글로 가로 쓰기를 먼저 시작을 했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민간까지의 확대였다.
정부간행물 순한글과 가로 쓰기로 단계적 변경방침에 대한 기사. 1967년 11월 21일 매일경제.
민간에서 국민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많이 접하는 매체는 신문이다. 하지만 이런 정부의 방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가로 쓰기를 가장 늦게 채택한 업계가 바로 신문이 아닐까? 싶다.
일간 신문의 경우는 1947년 8월 15일 『호남신문』이 처음으로 가로 쓰기를 채택하였다. 타 신문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전통적인 세로 쓰기를 고수하면서 부분적인 가로 쓰기를 시도하다가, 『스포츠 서울』(1985), 『일간스포츠』(1990), 『스포츠 조선』(1990) 등이 가로 쓰기를 채택하였다. 이후 종합일간지로서는 1988년 5월 15일 창간한 『한겨레신문』이 처음으로 전문 가로 쓰기를 채택하였다. 신문을 넘기는 방향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뀌게 된다. 그 뒤 『경향신문』이 1997년 4월 7일 자로, 『동아일보』가 1998년 1월 1일 자로 전면 가로 쓰기로 개편한다. 가장 마지막으로는 1999년 3월 2일 자로 『조선일보』가 전면 가로 쓰기로 전환하면서 신문 분야의 전면 가로 쓰기가 완성되었다. 우리가 쓰는 전면 가로 쓰기가 채택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아쉽게도 종합일간지 신문이 전면 가로 쓰기로 바뀐 1999년 이전에 타자기는 이미 컴퓨터에 밀려 사무실과 학교 등에서 자리를 내어주고, 폐기되어 버렸다. 결론적으로 최초의 이원익의 언문타자기와 송기주의 조선글타자기는 당시 글쓰기 문화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 쓰기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 타자기를 고민하여 만들었고, 그 후 공병우, 김동훈, 장봉선 등 다음 세대 개발자들은 광복 이후 정부의 가로 쓰기 지침 하에서 타자기를 가로 쓰기 방식으로 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병우박사가 처음 '속도타자기'를 개발하여 선 보였을 당시 민간에서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자를 쓸 수 없고 가로로 쓰는 방식이 변하지 않은 민간의 수요를 끌어당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군軍 에서 그 수요를 뒷받침해 준 것을 시작으로 정부와 공공기관까지 타자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가로 쓰기 타자기도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타자기 보급 1만 대 이상의 시대가 왔지만, 민간의 영역에서는 계속 가로 쓰기와 세로 쓰기가 공존했었다. 결국 타자기가 세상에서 쓰임을 잃고 사라져 가고 있을 때 비로소 가로 쓰기가 전 신문사에서 반영이 되었다. 그만큼 한 사회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화가 바뀌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여될 수밖에 없다는 걸을 '타자기' 그리고 타자기와 연결된 '한글'과 '글쓰기 문화'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풀어쓰기」와 「모아쓰기」
가로 쓰기와 세로 쓰기의 문제도 있었지만, 한글기계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큰 이슈 중에 하나는 풀어쓰기와 모아쓰기였다. 풀어쓰기의 쉬운 이해를 위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아래와 같다.
모아쓰기와 풀어쓰기 예시
실제로 과거 우체국에 '전보'라는 통신서비스가 있었다. 나이가 있는 독자 분들은 아마 아실 듯하다. 아래 이미지는 1962년 결혼 축하 전보이다. 이는 장봉선 두벌식 풀어쓰기 방식의 전신타자기(T-100)를 사용했던 것이다. 필자가 직접 전보를 보내 본 적은 없지만, 어렴풋이 어린 시절 우체국 창구에서 어른들이 전보를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전보는 마치 엽서처럼 디자인된 용지가 있었고, 발신자가 먼저 여러 디자인의 용지를 선택하고, 발신 문구를 써내면 글자 수에 맞춰서 그대로 발신을 해 주는 서비스였다. 전보의 경우, 일상적인 소식을 전하기보다는 긴급한 소식이나 메시지를 전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주로 1960~70년 때까지 많이 사용되었고, 80년대 이후 전화와 팩스가 등장하며 수요가 조금 줄어들기는 했다. 놀라운 것은, 조사해 보니 전보 서비스가 공식적으로 없어진 것은 2023년 12월 이후라고 한다. 원인은 이용률 급감이다.
이미지출처 글걸이. https://pat.im/1114
전보의 주요 내용은 제주 서귀포에 사는 분이 대구에 사는 지인에게 결혼축전을 보내는 내용이다.
"화촉의 성전을 축하하오며 행복을 비나이다"라는 것이 주 내용이다. 당시에는 이런 전신인쇄기로 우체국에서 전보를 보낼 때 두 벌식 풀어쓰기 방식이 사용되기도 했다. 전보에 대한 추가자료는 본문 하단에 링크를 참고 바람. 그뿐만 아니라 타자기에도 풀어쓰기 방식으로 개발된 것도 있다. 아래의 예시를 보면 중성 'ㅡ'를 알파벳 'U'처럼 표기하고, 받침이 있는 모음은 변형해서 표기를 하는 등 지금의 기준에서 본다면 오히려 더 복잡해 보이고 가독성이 떨어져 보인다.
풀어쓰기 모아쓰기 비교_1962년 11월 20일 경향신문
처음 봤을 때는 필자의 생각은 한 마디로 '이해불가'였다. 도대체 굳이 왜? 모아 쓰기가 아닌 풀어쓰기로 써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전혀 알 수 없었다. 서구문화를 지향하던 이들이 한글을 알파벳처럼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갈등은 1957년 10월 9일 경향신문에서는 한글 반포 511주년 한글날을 맞이하여 낸 특집기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이 기사의 핵심적인 맥락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쉬운 한글을 쓰자>는 담화로 시작해 이승만 정부가 이미 1933년에 제정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무시하고 한글을 다시 퇴보시키려 한다는 것에 대한 교육, 문화, 언론계 각 계 지식층의 반발이 담긴 것이다. 타자기 마니아들이라면 알고 있는 '외솔최현배선생이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이었는데, 이 <한글간소화파동> 당시 문교부편수국장에서 해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9월 19일 “민중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부치고자 한다”라고 발표함으로써 <한글간소화파동>은 끝이 난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독자는 한글간소화 파동을 검색해 보길 권한다.
1958년 1월 21일 한글학회 유제한 이사가 경향신문에 게재한 칼럼에도 한글 가로 쓰기와 한글기계화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음에도 빠르게 급변하고 있는 현대 과학 문명의 발달에 발맞춰 우리 문화도 함께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전제로 세 가지의 현안을 제시하는데, 첫째 한글전용, 둘째 가로 쓰기, 셋째 한글기계화이다. 여기까지 내용은 매우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결론에서는 한글을 가로로 써야 하는 이 모든 설명들이 한글을 가로로 풀어쓰자는 것이 유제한 이사의 맥락이었다. 그 이유는 활판인쇄 시 이천팔백 자의 활자를 써야 하는데, 풀어쓰기를 하면 24자만 쓰면 되기 때문에 편리하고, 효율적이어서 우리의 문화가 급속도로 향상될 것이라는 주장이다.(필자의 생각으로는 활자는 줄어들어 편할 수 있으나 글을 풀어쓰니인쇄할 지면이 몇 배는 더 늘어나는 단점도 있을 것 같다) 알고 보니 한글학회 유제한은 이승만 대통령의 당시 측근인 정치인 표양문을 통해 자신이 주장하는 한글 쓰기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로비를 하였던 인물이라고 한다.
아무튼,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한글 타자기 개발이 한글 풀어쓰기와 모아쓰기를 주장하는 학자 및 개발자들 사이에서 지난至難한 논쟁으로 인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58년 2월 7일 한글 풀어쓰기 타자기 통일 글자판을 정부에서 추진 결정을 내리겠다는 기사에<한글타자기 합리적 배열 협의회> 5인의 실무위원을 위촉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1958년 7월 11일 동아일보에는 다섯 벌식 한글타자기 개발자인 김동훈의 풀어쓰기와 모아쓰기에 대한 칼럼이 실린다. 당시 문교부에서 한글타자기 글자판의 통일안을 도출하기 위해 문교부 내에 <한글타자기 합리적 배열 협의회>를 두고 각계의 권위자와 학자, 연구가, 언론인 등 31명의 위원을 위촉하여 협의한 결과 최현배, 주요한, 공병우, 장봉선, 김동훈으로 5인의 실무위원을 선임하여 <풀어쓰기 자판>, <모아쓰기 자판>의 시안 작성에 착수한다고 한다. 모아 쓰기 통일시안은 속도와 자형, 단가를 염두에 두고 다섯 벌식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옆자음 초성(14자) 한 벌, 윗자음초성(14자) 한 벌, 받침 없는 중성 모음(13자) 한 벌, 받침 있는 중성모음(12자) 한 벌, 종성 받침(16자) 한 벌인, 다섯 벌구성으로 만들었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이건 김동훈식 다섯 벌식을 모아쓰기 통일안으로 만들었다는 것인가? 실무위원 중 장봉선도 본인의 종합타자기를 다섯 벌 방식을 만들었지만 그는 텔레타이프 두 벌식 풀어쓰기를 주창하는 인물이었으니 반발이 덜 했을 수 있으나, 모아쓰기로 세 벌식을 만든 공병우 박사는 이 당시 실무위원으로 어떤 입장이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풀어쓰기 통일시안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통일판의 일원화는 글자판 심의회 전체회의에서 한글타자기 글자판은 풀어쓰기와 모아 쓰기를 따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결국 하나의 통일시안을 만들지는 못한 것 같다. 모아 쓰기 타자기를 풀어쓰기 자판에 억지로 부합시켜서 대중의 혼란과 불편을 야기하지 말고 풀어쓰기에 대한 문제는 더 길게 내다보고 검토해야 한다는 다소 애매한 결론으로 기사는 마무리된다.
한글 타자기 시비_풀어쓰기와 모아쓰기 _ 김동훈_동아일보 58년 7월 11일
1962년 6월 27일에는 한글학회에서 부설로 <한글기계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약 반년에 걸친 연구 끝에 한글타자기 각종 글자판을 통일하는 방안으로 제정, 실현할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난다. 하지만 결론을 찾아보니 실패로 끝이 난다. 그 뒤 62년 11월에는 텔레타이프의 풀어쓰기와 모아쓰기에 대한 논쟁이 불이 붙기도 한다. 이때 당시 전남대학교 물리학과 송계범 교수(조선발명장려회에서 공병우박사와 2등 공동수상자)가 발명했던 한글 텔레타이프가 공개적인 검토를 받게끔 기회를 베풀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송계범 교수는 1949년 조선발명장려회에서 공병우박사와 공동 2등을 수상했었다. 그는 수상 이 후인 49년부터 계속해서 약 7년간 자신의 타자기를 완성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송교수가 개발한 타자기는 한글, 영문 겸용의 "자동판정식타자기"라고 부르는 것으로 「 풀어쓰기」가 가능한 것 외 여러 장점으로 주목받아 1956년 1월 이미 그 작동원리를 발표하는 공청회도 있었다. 1956년 당시 송계범교수가 36세였으니, 그가 조선발명장려회에서 공병우박사와 공동 2등을 수상했을 때 당시 나이가 29세였다는 것에 필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번 글을 위한 자료조사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마무리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한글타자기 개발에 참여를 하였다. 타자기의 개발 이전에 그들이 배웠던 '한글'의 철학적 신념에 따라 그들이 개발하는 타자기의 자판은 두벌식부터 다섯 벌 식까지 다양하게 발현되고, 글을 쓰는 방식도 풀어쓰기와 모아쓰기로 나뉘어 나타났다. 정부가 통일된 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저마다의 의견이 서로 합의되지 않았는지, 통일안은 마련되지 못했다. 모아쓰기는 타자기 이 전에 이미 손으로도 쓰고 있었던 방식이고,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모아쓰기 방식으로 한글을 쓰고 있는데,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진영의 주장과 노력으로 모아쓰기를 풀어쓰기로 바꾸기 위한 역사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신기하게도 최근에 자료 검색을 하던 중에도 아직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글을 올라와 있다.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숙제인가?
덧붙여, 풀어쓰기에 대해 수집한 자료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1958년 <한글타자기 합리적 배열 협의회>에 참여했던 5인의 실무위원 중에 한 사람인 장봉선 선생의 저서이다. 장봉선식 종합타자기는 모아쓰기방식도 있지만 그는 두벌식 풀어쓰기 방식을 주장했던 진영의 사람으로 장봉선은 공병우와 정반대의 입장을 가졌으며, <한글기계화운동. 송현 1982> 및 <한글 풀어쓰기 교본. 장봉선 1989 >을 보면 서로 비판적이었던 것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글 풀어쓰기 교본. 장봉선 1989 >에 있는 풀어쓰기 자료를 몇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풀어쓰기에 적용하려는 한글 자음과 모음의 자형이 필기체까지 있는데, 마치 알파벳을 흉내 낸 듯 보인다. 주태건 장봉선의 풀어쓰기 비교를 보면 같은 풀어쓰기 방식인데도 차이가 가독성의 차이가 느껴진다.
<한글 풀어쓰기 교본. 장봉선 1989 >의 표지와 풀어쓰기 샘플 페이지
길었던 자판 논쟁
위 두 가지 이슈와 함께 마지막으로는 표준자판 논쟁이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두 벌식 한글자판이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될 때까지 한글표준자판에 대한 논란은 정말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문제는 '표준'의 제정이라는 과정이 사용자의 뜻 즉, 민의(民意)가 반영된 결과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한글 표준자판을 담당했던 정부부처가 세 번이나 바뀐 것은 정말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57년에는 문교부에서, 1968년에는 상공부, 그리고 1969년에 과학기술처로 담당이 넘어왔다. 당시 신문 기사를 찾아보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청회와 회의를 한 것으로 나온다. 1962년에 한글기계화연구소에서 자판 통일하려는 작업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1968~1969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드라이브와 함께 정부 기관 주도로 자판 통일 작업이 진행된다. 1968년에 상공부가 표준 자판의 첫 시안으로 네 벌식과 두 벌식 자판을 발표하자, 공병우를 비롯한 민간 전문가들은 시안의 불합리함에 크게 반발하였다. 1969년 1월에 상공부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시안은 논쟁 끝에 결국 폐기되었다. 상공부로부터 업무를 넘겨받은 과학기술처는 민간 관계자가 참여하는 공청회 없이 사실상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하였다. 과학기술처는 1969년 2월에 둘째 시안을 내고, 1969년 6월 수동식 타자기용 네 벌식 자판과 전신 타자기(텔레타이프)용 두벌식을 표준안으로 공표하였다. 1969년 7월 28일에 '한글 기계화 표준 자판 확정에 따른 지시'(국무총리 훈령 제81호)로 이 두 자판을 타자기 표준 자판으로 확정 공포하였다.
1959년 7월 9일 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표준자판을 공표하기 10년 전부터 이미 한글타자기 특허가 20여 종에 달했다는 기사다. 이는 민간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한글 글자판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누가 타자기 개발에 관한 어떤 특허를 취득하여 가지고 있는지와 타자기를 생산화하며 보급한 수치까지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번 글을 위한 자료를 찾다가 '백성죽 타자기'의 활자 샘플을 찾았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궁금했던 타자기인데,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하게 되었다.
기업의 형태로 타자기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는 제작자는 공병우, 백성죽, 장봉선, 김동훈 네 명이었다. 타자기뿐만 아니라 타이피스트 양성에도 치열한 경쟁을 했다고 한다. 공병우타자기는 1959년 당시 기준으로 약 3~4천대가 보급되었다고 한다. 기계제작은 주로 미국의 스미스코로나 Smith Corona에 의뢰하고 있다고 한다. 백성죽 타자기는 서독 토피로 Torpedo사에 제작의뢰하고 있으며, 약 50대가 이미 판매 중에 있다고 쓰여 있다. 장봉선 타자기는 독일 올림피아 Olympia사에서 제작하여 약 200여 대가 보급되었다고 한다. 김동훈 타자기는 올리베티 Olivetti사에 의뢰하여 200대가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 진윤권, 이주성, 송계범, 미국에는 김준성이 거론되어 있다. 이렇듯 타자기 시장의 경쟁이 많아 통일글자판은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 자연도태 된 후 우수성을 인정받아 살아남은 자판을 통일자판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시장에서 자연도태되고 살아남는 우수한 타자기를 정부는 약 10년을 기다리다가 결국 시장에서 통용되는 글자판을 수용하지 않고, 정부 자체로 개발한 네 벌식(텔레타이프는 두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확정해 버린 꼴이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표준자판 공포 후 3년 뒤인 1972년에 정부의 표준 자판에 모순이 많다며, 한글기계화연구위원회(위원장 주요한박사)에서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주최 전신타자통신망 일원화에 관한 세미나를 통해 정부의 표준판을 전면 거부하는 새로운 공통 글자판 시안을 내놓으며한글기계화 정책에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주요한 박사는 정부의 표준자판(네 벌식)은 모순이 있어서 활자대가 서로 엉키고, 속도 또한 공병우의 세벌식이나 김동훈 다섯 벌식보다떨어져 실용화되지 않고,일원화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한글기계화정책의 또 하나의 과제 표준글자판 모순 많다_경향신문_1972.02.01.
정부에서 네 벌식 표준자판을 공포 후 공병우박사는 자신의 세 벌식 자판의 우수성과 표준자판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거의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정부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1978년 7월 19일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그 싸움의 양상을 살펴보자. 공병우 박사는 혼자 싸우지 않았다. 민간의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연대했다. 한글기계화촉진회 주요한, 문장용 타자기연구회 송현, 한국타자교육회 김성,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정대청 등 각 연구단체들과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관계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했었다. 또한 여러 가지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고, 국회에 「한글표준자판 개정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필사적인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공병우 박사가 주장한 정부 표준자판의 문제점은 크게 일곱 가지로 요약된다.
① 수동식타자기(네 벌식)와 텔레타이프자판(두 벌식)이 실질적으로는 하나로 통일이 되지 못했다.
② 표준자판의 타자속도가 세벌식에 비해 약 25% 떨어진다.
③ 표준자판은 세벌식에 비해 배우기가 어렵다.
④ 오타 발생률이 높고, 윗글쇠(쉬프트) 사용빈도가 높아 속도가 느리고 활자의 충돌이 많아 고장률이 높다.
⑤ 정부의 두벌식 텔리타이프는 모아쓰기를 하려면 전자회로를 사용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비용이 소요된다.
⑥ 세 벌식은 한글과 영문 겸용 제작이 가능하나, 정부표준은 불가능하다.
⑦ 표준자판은 그 밖에 여러 가지 모순을 지니고 있다.
반면, 정부는 행정력을 이용해 표준자판의 보급에 힘썼다. 네 벌식 표준자판의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타자학원 등에서 정부표준자판인 네 벌 식을 가르치게 하고, 국가기능검정시험에도 네 벌식을 적용하여 시험을 치도록 하였다. 과학시술처 정부 관계자의 입장은 확고했다. "정부가 정당한 과정을 거쳐 한 번 정한 것을 다시 고칠 수 없다"라고 말이다.
마무리는 글걸이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팥알님의 글이 필자의 생각과 일치하여 글을 인용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네 벌식 자판은 텔레타이프 전신용으로 만든 두벌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사무용 표준이 된 네 벌식 타자기는 속도에서는 공병우 세 벌식에 밀리고, 글씨체에서 김동훈 다섯 벌식 타자기보다 나을 게 없었다.자판을 통일한다는 취지가 무색하게 1980년대 초까지 이 세 가지 자판이 공존하는 상황이 이어졌다.정부 기관이 나서 표준 자판을 만들어서 오히려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꼴이 되어버렸다.(필자도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한글 자판이 사실상 최종적인 통일되는 계기는 1970년대 들어와서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면 서다. 컴퓨터용 한글 자판이 업체마다 제각각이었던 문제로, 과학기술처는 컴퓨터용 표준 자판을 제정하기 위해 1981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연구 용역을 준다. <표준한글자판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결정 모형의 개발>(이만영, 국어정보학회, 1992.3.)에 따르면 표준 자판을 확정하기 위한 이 연구는 당시 업계에서 많이 쓰던 자판을 큰 무리가 없으면 채택하려던 과학기술처의 요식행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결국 이 연구를 통해 정부는1982년에 '정보처리용 건반 배열(KSC 5715)'이란 이름으로 1969년의 것과 거의 같은 두벌식 자판을 표준 자판으로 공표한다. 수동타자기에서 기존의 네 벌식 표준 자판은 1983년에 폐지되고, 두 벌식 표준 자판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말이 두 벌식이지 실제는 자판의 키캡만 두 벌식으로 바꾼 네 벌식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많다.
두 벌식은 입력 방식이 단순하고 글쇠 수가 적어서 빨리 익히기 좋은 반면에, 초성과 종성(받침)을 같은 글쇠로 치기 때문에 '안녕' '옹알이'와 같은 말을 넣을 때 한 손가락 또는 한 손으로 잇달아 쳐야 하는 구조상의 문제점이 있었다. 현행 표준 자판은 배열 문제까지 있어 손가락의 피로와 오타율이 높다. 자판을 설계할 때 손가락 부담이 집게 > 가운데 > 약지 > 새끼 순이 되도록 글쇠를 배열하는 것이 상식이나, 표준 자판은 왼쪽 새끼손가락의 부담이 크고 집게손가락의 부담은 오히려 적은 편이다. 1981~1982년의 표준 자판 제정 과정에서 정부는 배열 문제를 다시 검토, 바로 잡을 수 있었으나, 표준을 빨리 확정하려는 정부 부처의 의지와 쓰던 것을 그대로 쓰고 싶어 하는 업계의 바람이 맞아떨어지면서 문제를 개선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훨씬 더 많은 고민과 경험을 해 온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1~2년이란 단기간에 뚝딱 만들어진 정부의 표준 자판이 공병우 세 벌식이나 김동훈 다섯 벌식 처럼 오랜 기간 고심한 자판과 어찌 같다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두 가지 모두 인정을 했다면 좋을 것 같다. 속도는 공병우, 체제는 김동훈으로. 탁상 행정과 요식 연구로 과학기술처 담당자들은 당시 일을 편하게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그 덕분에 표준 자판을 쓰는 많은 국민들은 겪지 않아도 될 불편을 두고두고 떠안게 되었고,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자판을 쓸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 버린 결과를 초래하였다.
어쩌면 이런 탄식은 1981년에 했었어야 했다. 음성으로 말만 하면 인공지능이 문자를 입력해 주고 요약까지 해 주는 2024년에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지만, 우리가 아끼고 발전시켜야 가며 써야 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한글'. 그 한글을 '타자기'에서 누구나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글기계화'에 뛰어들었던 많은 선구자들의 노력이 결국 정부의 안일한 행정 아래 많은 이들의 오랜 노력과 지난한 투쟁이 끝내는 빛을 발하지 못한 안타까운 한글 기계화 역사를 누군가는 알아하고 그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알려야 하지 않을까?
"타자기"를 통해 이어지는 한글기계화 역사를 톺아보기를 통해 살펴보았다. 정부 표준이었던 네 벌식의 태생적인 문제를 언급하다 보니 다소 부정적 표현이 들어 갔지만, 결국 필자도 수동 타자기 입문할 때 네 벌식으로 익혀서 그런지 지금도 가장 능숙하게 사용한다. 지금에 와서 네 벌식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제 네벌식 자판은 그저 안타까운 역사적 산물과도 같다. 타자기가 종류대로 다 있다보니 사용에 있어서는 두 벌,세 벌,네 벌,다섯 벌을 가리지 않는다. 한글기계화 톺아보기 시리즈를 정리하면서 필자가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도 있어서 유익한 점도 있었으나, 아직도 공부가 부족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래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된 것도 성과라면 성과일 듯하다.(내가 꽤 긍정적인 사람임) 매주 마감의 압박과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는 타자기를 통한 필자의 진짜 경험을 위주로 풀어 나갈 예정이라 부담 없이 즐겁게 써내려 가려고 한다. 다소 재미없을 수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참고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