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머링 맨

보편적인 가치

by Yimhyehwa




서울 종로구 혜화동을 이십 년 가까이 살면서 의외로 교통 환경이 꽤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환승 없이 강북과 강남을 직행할 수 있는 버스도 많고, 모든 길들이 평탄해서 걷기도 좋다. 직장인으로 살면서 거쳐 갔던 일터는 광화문, 마포, 여의도, 역삼이었는데 이 모든 곳들이 혜화에서 버스를 타면 짧게는 30분에서 길면 1시간 이내에 다다른다. 서울에서 이 정도 통근 시간이라면 받았다 느낄 때가 많다.


나를 장으로 가장 많이 데려다준 버스는 160번이다. 이 버스의 시작점은 모르겠지만 늘 혜화동을 거쳐 종로, 서대문, 공덕, 마포, 그리고 여의도로 향한다. 겨울이 되면 추운 날의 버스만큼 안전한 곳도 없다. 인파에 밀려 마음의 여유를 둘 곳이 없지만, 비좁은 공간에서 추위에 떨지 않고 무사히 종착지를 향해 가는 것도 일상의 작은 평온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어김없이 신호 때문에 멈췄던 곳에 머물러 있고, 가끔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보면 익숙한 풍경이 가득했는데 오늘 만큼은 새로웠다. 산타 신발을 신고, 산타 모자를 쓴 거인 같은 조형물 하나가 떡 하니 서 있었다. 서대문역 부근에 있는 흥국생명빌딩 앞에 망치를 든 한 남자, '해머링 맨'의 모습이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정보통신신문(2025.11.25)게재, "산타가 된 해머링 맨, 사랑의 열매 달다"


코앞에서 보면 정말 크고 무서운 느낌마저 주는 해머링 맨에게 산타의 굿즈를 장착하니 귀엽기도 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난데없이 스며드는 묘한 기분을 놓치기 싫어 해머링 맨의 이것저것을 생각하다 원점으로 되돌아오니, 문득 해머링 맨이 상징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실은 예전부터 왜 망치를 들고 있는지, 망치질하는 모션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지나칠 때마다 묻곤 했는데 이제야 답을 찾아보면서 수년간 쌓인 게으름의 먼지들을 털어내는 순간이었다.


해머링 맨은 미국의 설치 조각가인 조나단 보로프스키 (Jonathan Borofsky)가 만들었다. 작가 조나단은 튀니지의 한 신발 수선공이 묵묵히 망치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후 강철을 소재로 해머링 맨을 탄생시켰다. 해머링 맨은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 11개 도시에 설치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7번째로 만들어진 것이며,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이라고 한다. 높이는 22미터, 무게는 50톤에 달한다.


해머링 맨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 35초마다 망치질을 반복한다. 소리를 내거나 다른 동작을 섞지 않고 오롯이 망치질만 한다.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의 노동이 모여 세상을 지탱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말과 공휴일에는 작업을 멈추고 쉬기도 한다. 노동을 통한 고된 삶에도 쉼의 중요성을 표방하기 위해서다. 도심 속에서 휴식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현대인의 자화상 같다. 우리는 해머링 맨을 지나치며 바쁜 서로를 잊기도 하고, 또 서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해머링 맨의 망치질은 그 자체로 노동이지만, 우리는 거기에 가치를 떠올리거나 세상의 진보를 곧바로 연결하지 않는다. 가치가 있는 일과 세상의 진보를 이뤄낸 일들이 마치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도 많다. 모든 게 대가를 수반하는 일들이지만 비싼 노동과 값싼 노동을 구분 짓는 현실에서 나 역시 비싼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오늘 내가 닿아야 할 곳은 이 넓은 세상에서 나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품어준 대신, 인격과 육체를 일치시켜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곳이다. 그것을 통해 받는 월급으로 나의 가치가 증명된다. 서글픈 현실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지고 괜찮아진다. 딱히 발 디딜 곳이 없고, 따끔하고 불편한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 아쉬운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모든 사람의 노동은 작든 크든 고되고, 의미 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돈으로 환산할 생각 말고, 온 마음으로만 바라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세상이 올 리 없다는 건 알지만, 오래전부터 바랐던 것이라 기적을 꿈꿔 볼 테다.


해머링 맨,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