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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어X Mar 15. 2018

지금, 왜, 뮤지컬로? 뮤지컬 <햄릿:얼라이브>

by reviewerX 클레어

햄릿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희곡이다. 2017년 대한민국에서만 해도 판소리 햄릿, 연극 햄릿, 뮤지컬 햄릿과 같이 다양한 장르의 햄릿이 공연되었다. 많이 공연된 만큼 햄릿은 대체로 원형 그대로 보다는 변주되어 공연된다. 연극 <함익>은 햄릿을 여자로 바꾸었고, 연극 <리턴투햄릿>은 햄릿을 공연하는 배우들의 뒷이야기를 다뤘다. 체코 뮤지컬 <햄릿>은 햄릿과 오필리어의 러브 스토리에 방점을 찍었다. 햄릿이라는 수단은 동일하지만 각 작품들은 자기만의 관점으로 햄릿을 해석하고 햄릿을 통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뮤지컬 <햄릿:얼라이브>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없다’였다. 뮤지컬 <햄릿:얼라이브>에서 햄릿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햄릿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햄릿 그 자체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새로운 관점도 변형도 없이, 뮤지컬은 죽은 햄릿을 그대로 살려 뮤지컬 무대에 내려놓았다. 

비극과 멜로드라마 사이 어딘가 

연극에서 햄릿은 종종 원형 그대로 공연되기도 한다. 원작 희곡 햄릿의 본질을 느끼자는 취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연극에서만 가능할 뿐 뮤지컬에서는 아니다. 이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속성(멜로드라마)과 햄릿의 본질(비극)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희곡 햄릿은 비극이다. 갈등의 원인은 인물 그 자체이고, 이 길이 맞는가, 이 행동을 해도 되는가를 고민하는 주인공의 내면이 작품의 핵심이 된다. 주인공 밖에서 인물들의 선악은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반면 멜로드라마의 구조는 비극과 반대이다. 멜로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갈등의 중심이 주인공 밖에 있다는 것이다. 멜로드라마 속 주인공은 내면에서 선악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는다. 선한 주인공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고 주인공 밖에서 명쾌하게 선악이 구분된다.  


문제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멜로드라마 구조의 극치라는 점이다. 춤과 노래는 멜로드라마적 구성을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표현 수단이다. 연극의 독백과는 달리 노래는 인물의 내적 고민을 깊게 침투하기 어렵다. 최근 <넥스트 투 노멀>과 같이 드물게 멜로드라마적 구조가 아닌 심리 드라마들이 뮤지컬로 공연되고 있으나 이는 예외일 뿐, 대부분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 갈등이 노래로 처리되는 순간 그 무게는 가벼워지고야 만다. 그렇다고 주인공의 고민을 노래가 아닌 대사로 서술한다 한들 이는 넘버와 넘버 사이에 묻혀 지나갈 뿐이다.  


그런데 지금, 뮤지컬 <햄릿: 얼라이브>는 멜로드라마 구조의 뮤지컬을 통해서 정통 세익스피어 비극 <헴릿>을 보여주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이런 시도를 하고 싶었다면, 뮤지컬의 문법에 맞게 희곡을 변형하거나 희곡의 정수를 살릴 수 있는 뮤지컬 구조를 고민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뮤지컬 <햄릿:얼라이브>는 희곡에 노래만 얹었다. 그래서 형식은 멜로드라마인데 담고 있는 주제는 비극이라는 모순이 계속 충돌하고 작품은 비극도 멜로드라마도 아닌 어정쩡한 어딘가를 떠돈다. 분명 햄릿의 원형을 그래도 보존했음에도, 뮤지컬 <햄릿:얼라이브>는 햄릿이라는 절대 선, 클라우디스라는 절대 악이 고정된 상태에서 햄릿의 시각으로 진행하는 권선징악 멜로드라마로 읽힌다. 그러다 어느 순간 햄릿은 갑자기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데, 햄릿의 고뇌를 점층적으로 쌓아오지 못했으니 그 대사는 의미 없이 흩어질 뿐이다.  

지금 왜 햄릿인가  

제작자들이 이러한 모순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굳이 햄릿을 그대로 뮤지컬로 만들었다면 분명 지금 햄릿을 공연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홍광호와 같은 탑 배우들을 내세워서 단순히 돈을 벌고자 하는 목적이었다면 햄릿보다는 더 쉽고 편리한 주제들이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이들은 햄릿을 선택했다. 그래서 지금 왜 햄릿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극 속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프로그램을 펼쳐보았다.  


작곡가는 지금 왜 햄릿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졌으나 찾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연출가는 무대 위 커다란 거울로 자꾸 관객을 비추는 것이 관객 각자의 의미를 가져가길 바라는 취지란다. 프로듀서 또한 관객이 자신만의 답을 찾으라고 한다. 결국 이들은 지금 왜 햄릿인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공연을 만들었고 그 몫을 관객에게 떠넘겼다. 만드는 사람들이 찾지 못한 답을 과연 관객이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연출가 아드리안은 초연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보여줬던 미니멀하고 감각적인 무대 미장센의 장점을 이번에도 십분 발휘하긴 했다. 무대에 꽂힌 수직 막대들과 천장에 매달린 큰 거울의 이동으로 표현되는 무대는 매우 모던하고, 미니멀한 무대에서 조명은 적재적소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배우의 의상들은 현대식 정장으로 표현되었는데 엘시노어라는 시대 배경을 바꾸지 않았음에도 무대와 잘 어우러져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햄릿을 무대화하면서 연출이 해야 하는 고민은 의상과 무대를 어떻게 표현할까? 보다는 더 깊은 차원이어야만 한다. 지금, 왜, 하필 뮤지컬로, 햄릿이어야 했을까?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없는 작품은 혼란스럽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본 것도 아니고 기승전결이 확실한 뮤지컬을 본 것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와야 했다. 사느냐 죽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연극인지 뮤지컬인지, 비극인지 멜로드라마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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