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eviewerX 잭더리퍼
영화를 무대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반대의 경우는 오히려 흔하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양쪽 모두 일정한 서사와 하나하나의 장면을 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장르인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넘나듬에 기대와 걱정이 섞이는 것은 둘의 닮은 구석만큼 읽어내는 방법에 분명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아무리 장르를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최근의 행보를 지닌 연출가 ‘고선웅’이라 할지라도 영화 <라빠르망 L'Appartement>을 무대로 옮겨 내겠다 할 때 반사적으로 고개를 갸웃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아파트를 매개로 하여 막스와 리자 그리고 알리스의 각기 다른 사랑의 방식을 보여주는 영화로 전체적으로 멜로 장르이면서 보기 드물게 단서의 조각들을 맞추어 나가는 스릴러적 요소도 함께 갖춘 수작이다. 영화의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눈앞을 스치고 장면의 연결로 이루어진 긴장과 속도가 떠오른다. 이렇게 교차하는 이야기들과 원작 특유의 분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낼 것인가 하는 의문들은, 이내 현실화 된 연극 작품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공존 : 영화, 그리고 연극의 미덕
이래도 되는 걸까. 영화 <라빠르망 L'Appartement>의 기억을 안고 극장을 찾게 된 관객은 처음부터 꽤 당황스럽다. 시작을 알리는 암전과 동시에 걸어 나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알리스’ 탓이다. 꼬박 두 시간짜리 원작 영화에서는 주인공임에도, ‘알리스’는 절반이 지났을 무렵에야 처음으로 등장한다. 영화 <라빠르망>은 ‘막스’의 현재에서 회상으로 전환하며 시작하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수시로 시공간을 교차해 이야기를 풀었고, 이것은 영화에 열광하게 했던 매력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오해와 어긋남의 이유를 교차편집 되는 장면으로 추리하는 재미와 스릴러 같은 긴장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연극 <라 빠르트망 L'Appartement>은 이 매력을 활용하지 않는다. 첫 장면을 바꾸어 교차되는 시간을 버리고 순서대로 재배열하여 진행하는 것이다. 찰나적으로 평범함과 지루함이 예상된다. 하지만 영화의 방식이 가지는 스릴과 긴장감을 이미 해소하고 들어가는 것은 다른 지점에서 연극만의 장점을 획득하는 반전을 만들어낸다. 드라마가 순차적, 점층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행동의 인과가 분명해지는 까닭에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랬어?!’ 라는 뒤늦은 깨달음의 낙차보다는 ‘그랬구나.’ 의 공감을 하기에 쉬운 것이다.
더불어, 이렇게 형성된 이해와 공감은 인물에게 스스로를 이입하여 극을 보게 한다. 영화에서는 장면들을 노려보는 영원한 타자로 존재할 뿐이지만 연극에서는 관객이 무대 위의 누구이든 인물로서 기능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셈이다. 그러니 이러한 연쇄는 표현하고자 하는 어긋나고 아슬한 사랑이라는 주제에 더 몰입할 수 있게도 한다. 그래. 이래도. 이래도 되는 거였다.
첫 장면의 변화로, 화자의 변화로, 이해와 시각의 변화로.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선형이 되었다. 그럼에도 작품은 영화가 가졌던 다층적인 결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게 구성된다. 이것을 무대를 표현하는 방식이 충실히 돕는다. 제목 <라 빠르트망 L'Appartement>은 ‘아파트’라는 공간을 나타낸다. 높이와 계단으로 표현되는 수직적 이미지는 장면의 분절이 가능한 영화에서는 전혀 무리가 없는 배경이다. 그러나 무대는 상황이 다르다. 영화와 같은 이미지를 좇아 높다란 구조물을 세워 둔다면 조악할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활동 공간은 지극히 협소해 지고 만다. 여기에서 극은 무대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한 또 한 번의 영리한 선택을 한다. 수직을 과감히 수평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아파트의 높이와 거리감은 2중 회전무대로 대치되었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거리는, 계단으로 이어진 높이는 회전하는 무대에서 힘차게 달려가는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방법으로 이해된다.
또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전이 가능한 2중의 회전무대는 미세한 각도의 변화에도 동일한 오브제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가져온다. 공간은 변화되어 보이며 선택적으로 가려져 보지 못했던 것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리사와 알리스의 마주 보는 아파트는 리사의 공간이었다가 다시 알리스의 공간이 된다. 불투명 유리 속에서 전화하는 리사와 유리 밖에서 서성이는 막스를 동시에 본다. 동시다발적으로 놓인 공간을 드러내는 표지는 회전하는 무대 위에 놓여 움직이며 각도에 의한 공간 변화, 공간에 따른 시선변화, 그리고 시선에 따른 감정의 변화에까지 이르게 한다. 각기 다른 주인공의 관점과 견해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 지지 않았던 것을 보며 이렇게 다시 한 번 이해된다. 이것은 영화에서 카메라가 보여주지 못하는 선택적 시각을, 공간이 제한되어 어쩔 수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늘어놓아야만 하는 무대가 재치를 발휘해 만난 예상된 시너지다. 이렇게 표현 방법과 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가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의 무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상을 드러내어 관객의 시선을 이끄는 것은 영화의 교차편집과 유사한 효과를 재현한다. 더불어, 다른 위치에 다른 균형점을 가지고 달린 네 개의 판넬과 판넬에 조사되는 편집된 영상은 영화적인 시각을 보완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멍청이’ 같은 단순한 대사들은 주인공에서 발화되어 다른 인물들의 입에서 반복되고 이것은 장면으로 연결된다. 필요한 부분에는 소리임에도 영화적인 편집기법이 활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집중 : 연극으로, 연극적인 장치들로
연극 <라빠르트망 L'Appartement>은 작품 속에서 연극의 정체성을 확실히 함과 동시에 연극 자체를 살뜰히 활용한다. 두 명의 여자 주인공이 극 중 연극배우인 까닭에 원작에서도 연극의 장면들, 즉 극중극이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다. 이 작품은 허미아, 헬레나로 연상되는 어긋나 버린 사랑의 방향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영화에서 단순히 어긋나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작품의 이미지만을 취했다면 연극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사들을 활용한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속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극의 내용과 연결되는 대사들을 더 많이 가져온다. 대사들은 절절히 설명하지 않아도 극 중 극의 발화인 동시에 인물의 심정을 딱 맞아 떨어지게 대변한다.
‘드미트리우스가 사랑하는 것은 너 잖아. 너의 춤을 나에게 옮길 수 있다면, 넌 어떻게 드미트리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이는 나를 더 미워해. 너의 아름다움 때문이지! 내가 죽든 당신을 찾아내든, 둘 중에 하나. 나의 얼굴은 위선적이야. ……그저 당신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뿐만 아니라 마음을 나타내는 대사들은 셰익스피어 이외의 작품으로까지 확장된다. 체홉의 갈매기 속 니나를 가져오기도 하고 ‘타 버린 숯덩이여, 예전에는 흰 눈 쌓인 나뭇가지였지 너.’ 같은 일본의 시 구절을 더하여 인물들의 현재 상황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스쳐 지나가듯 기능적인 원작의 대사들에도 복선을 심어 극성을 강화한다. ‘악마의 색깔이니 연극 초연을 할 때에는 초록색을 입지 말라’ 는 미신 같은 리자의 대사는 영화에서는 그저 의미 없는 것에 불과하다. 알리스는 초록색 옷을 러닝타임 내내 입고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다르다. 초록색은 알리스를 보다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치로 기능하며 알리스의 공연 장면에서의 의상과 조명도 모두 초록색으로 감정을 극대화 한다.
무의식적인 코러스도 주제를 강화하는데 힘을 보탠다. 극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필요한 몇 명의 인물들을 멀티 캐릭터로 설정하고 주제를 향한 코러스로 활용한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사소하게 떠돌면서, 허공에 흩날리면서 노래한다. 노래는 스미듯 인지된다. 노래는 리자와 막스의 사랑이 끝나고 다시 한 번 시작될 것 같았던 막스와 알리스의 사랑이 끝나는 것을 은유한다. 이러한 사랑의 대칭적 연결고리는 리자의 죽음과 다니엘 아내의 죽음에서도 드러나며 노래는 은유인 것처럼, 복선인 것처럼 이야기를 돕는다.
하나의 이야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네./ 언제나 두 번 되풀이 된다네./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그리고 연극<라빠르트망 L'Appartement>은 되풀이되는 그들의 어긋나는 사랑으로 마무리 된다.
첨화 : 시그니쳐signature, 고선웅 스타일
작품에 연극적인 재미를 더하는 것은 연출가 고선웅 스타일의 언어다. 빠르고 간결하며 정확하게 들어오는 언어와 억양들을 작품 속에 넣어두는 연출은 멜로물인 이번의 작품도 빼놓지 않았다. 작품의 대사들은 원작의 것들을 충실히 따르지만 곳곳에는 심각한 상황을 약간씩 비트는 언어들이 흩뿌려져 있다. 멀티 캐릭터는 승무원으로 분하여, “도쿄로 떠나게 되시면 다시는 이런 순간이 생기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십초 남았습니다. 십, 구, ……, 이, 일, 영점 구, 영점 팔,……” 라며 출국을 망설이는 막스의 상황과 마음의 소리를 대신 발화해 웃음을 준다. 뮤리엘의 “왜 왜왜? 뭘 뭘뭘?” 처럼 예상치 못한 간결한 반복과 인물의 대사에서 발견되는 톤, 고저의 차이로 발생시키는 유머도 있다. 이는 자칫 우울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멜로가 될 지도 모르는 작품 속 드라마를 보송보송하게 만든다.
연극 <라빠르트망 L'Appartement>에 대한 기대와 걱정은 연극임을 잊지 않은 언어와 무대상황을 고려한 장면들의 연결로 치환되었고 만족으로 변화했다.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시선으로 인물들의 감정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시대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영화 <라빠르망 L'Appartement> 연극화 작업은 의미 있다 하겠다. 장면의 재현이라는 강박을 벗고 무대의 방식에 맞추어 새로 읽어 재구성하여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은 걱정했던 것처럼 단순한 ‘사랑 찾기 편집 이미지 모음’ 이 아니라 각각의 캐릭터에 이입하여 스스로의 사랑과 생각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