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후 (管虎) 감독, 八佰,2020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가운데 영화산업이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 극장가는 한파를 맞았고, 제작사들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올해 중국에서 흥행 최고기록을 세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된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지목된 우한의 투쟁을 그린 [최미역행]이 아니다. 관후(管虎) 감독의 [팔백](원제:八佰)이란 작품이다. 지난 8월 개봉되어 ‘띄어 앉기’ 속에서 무려 30억 위앤(5천억원)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코로나로 꽁꽁 얼어붙었을 극장을 저렇게 달구었을까. [800]은 1930년대 항일전쟁시기의 격전을 다룬 영화이다. 느낌이 올 것이다. ‘애국’과 ‘항일’이라는 정서적 충격파로 가득한 프로파간다 영화이며, 이른바 ‘국뽕’영화일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영화는 1937년 10월 26일에서 30일까지 펼쳐진 상하이 공방전을 다룬다. 정확히는 상하이를 관통하는 수쥬(蘇州) 하천의 북쪽에 위치한 건물(사행창고) 공방전이다. 그해 8월 일본은 노구교를 넘어 파죽지세로 대륙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당시 중국(국민당)은 80만의 군사로 대적하지만 역부족, 연전연패 밀리면서 상하이까지 후퇴한 것이다. 이때 상황을 잠깐 일별하면 그 전까지 중국은 북으로는 일본과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했고, 내부적으로는 모택동의 공산당 세력과 싸워야했다. 당시 장개석의 판단은 일단 공산당부터 박멸하고, 전열을 정비한 뒤 일본을 몰아낼 생각이었지만 공산당의 전략, 일본군의 우세 속에서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개석(국민당)이 생각한 묘수는 브뤼셀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서 연합국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다. 국민당의 대병력은 (대륙의) 서쪽으로 철수했고, 아주 일부 세력만 상하이 ‘사행창고’에 남겨두고 일본군과 결사항쟁하도록 한 것이다. 그럼, 30만 일본군과 결사항쟁할 중국의 선발된 용사들은 누굴까. 바로 영화 제목이 말하는 ‘800전사’들이다.
● 사행창고를 사수하라
어찌 보면, 상하이 ‘사행창고’(四行倉庫)주둔은 신의 한수이다. ‘사행창고’는 당시 상하이의 네 개의 큰 은행들이 합자하여 만든 일종의 물류창고였다. 당시로서는 아주 튼튼하게 지은 6층 건물이었고, 내부에는 물자가 가득 했다. 하천 건너, 도로 건너 영국과 미국의 조계지가 위치했다. 영국과 미국인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수많은 상하이 시민들이 이제 강 건너 전쟁을 실시간으로 구경/관람하게 되는 것이다. CNN의 전쟁뉴스 시청이 아니라, 맨눈으로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는 것이다. 일본군은 중화기로 이곳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영미조계지였고, 근처에는 대규모가스저장소가 있어 폭발이라도 하면 외국 조계지는 물론 상하이가 날아가 버리니 말이다. 전 세계 취재진이 조계지에 모여들었고 카메라를 들이대며 중국-일본 공방전을 세계에 보도하기 시작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대거 서쪽으로 철수하고 남겨놓은 부대는 국민혁명군 3전구(戰區) 88사단 524단(團) 예하 병역이었다. 부사단장 사진원(謝晉元)이 지휘를 맡았다. 그의 휘하 부대원은 ‘800명’이 아니라 모두 400여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서둘러 새로 충원한 부대였다. 주력 인원은 인근 호북성 보안단(保安團) 신병들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탈영병(으로 취급되는) 사람들까지 긁어모아 최후의 공방전을 준비한다. ‘보안단’은 장개석의 정예부대가 아니라, 당시 각 지방에서 만든 보안무장 조직이다.
영화 [800]은 이 기이하고도, 기막힌 전투를 한껏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다. 병사들은 오합지졸에 가까웠고, 적의 침략을 어떻게 저지할지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쩜 장개석은 단지 수세에 몰린 중국군의 처절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예상대로 일본군의 대공습이 시작된다. 일본군이 창고의 한쪽 벽을 뚫기 위해 탱크를 앞세워 돌격해 온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피가 끓어오르는 장면이 펼쳐진다. ‘자폭 병사’들이 등장한다. 도저히 방어가 안 되자 중국군인은 한 사람씩 온몸에 수류탄을 두르고 일본군 위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또 한 사람. 죽음을 각오한 용사들이 줄은 서 있다.
● 역사와 영화
강 건너 공방전을 리얼타임으로 지켜보던 조계지의 중국인들, 상해인들은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죽음으로 진지를 수호하는 중국군을 응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중에는 양혜민(楊惠敏)이라는 스카우트 소녀(女童軍)가 있었다. 양혜민은 일본의 일장기는 보이는데 자기 나라 국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모험을 시도한다. 중국인의 자긍심을 위해, 몰래 국기(당시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온몸에 두르고 강을 건너, 사행창고로 접근 중국군에게 전달해 준다. 중국군은 ‘상해 시민들이 우리를 이렇게 지지해 주고 있다’는 믿음에 울컥하며, 옥상에 청천백일기를 휘날린다. 이 장면이 또 장엄하다. 마치 2차 대전 때의 ‘이오지마 성조기’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된다. 이제 사행창고 옥상에서는 게양대의 깃발을 둘러싼 전투가 시작된다. 일본군이 전투기를 띄워 게양대 사람을 향해 기총소사하기 시작한다. 장엄하게 죽으면 또 누군가가 달려가 게양대를 일으켜 세운다. 또 기총소사,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끝없이 국기를 지키기 위한 죽음의 행렬은 시작된다. 강 건너 중국인들은 또 다시 분기탱천, 열혈애국심에 넘친다. 영화는 예상대로, ‘선정적일 만큼’ 민낯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구국적 행동으로 점철된다.
결국 전투는 퇴각명령으로 끝난다. (브뤼셀회의가 실패로 돌아가고) 영미 국가의 압력(?)으로 장개석 군은 사행창고에서의 철수명령을 내리고 팔백 용사는 다리를 건너 조계로 넘어온다. 일본군이 가만 두지 않는다. 일본군의 조준, 무차별사격이 시작되고 생사를 건 철수작전이 펼쳐진다.
내가 중국인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피가 끓어오르는 애국심이 절로 생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이다 보니 영화를 보면서 ‘실제 저랬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게다가 요즘 중국영화는 원래 ‘과장’이 심한데다가 ‘국뽕’에 너무 취한 것 같다. (국뽕은 국수주의를 비하하는 표현이긴 하다)
● 영화는 영화일 뿐?
실제 사행창고 공방전에서 일본 전투기의 기총소사는 없었다. 일본군이 ‘옥상의 청천백일기’에 화가 나서 가일층 공세를 펼치긴 했지만 비행기를 띄우고 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중국개봉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휘날렸던 중국의 국기 청천백일기는 지금 대만 국기이다. (올림픽 때 남북한 단일팀이 ‘한반도기’ 들고 가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대만은 자국 국기를 들고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대만올림픽위원회 깃발을 들고 출전한다!) 중국 극장에서는 청천백일기가 블로우 처리되었다. 대만의 애국가로 쓰이는 노래가 영화에 등장하여 중국 영화팬이 어리둥절하기도 했단다.
그럼, 가장 자극적인 애국심을 고취하는 수류탄 자폭장면은 실제 있었을까. 진수생(陳樹生)이라는 군인이 실제 그런 구국의 희생을 한다. 그가 남긴 유서가 바로 영화에 등장하는 ‘사생취의, 아소원야’(목숨을 던져 대의를 얻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이다. 그때 나이 겨우 21살이었단다. 어쨌든 진수생의 희생은 영화 [800]에서 그렇게 사용되어진다.
하나 더, 청천백일기를 전달하는 걸스카우트 양혜민의 이야기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이 이야기는 1975년 대만에서 [팔백장사](八百壯士)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소녀주인공 역은 임청하가 맡았었고 공전의 흥행성공을 거둔다.
영화에서는 하천 건너, 이쪽에 영국과 미국의 조계지가 있다고 설명되는데 당시 창고 동쪽도 조계지였다. 그러니 일본군의 진군은 북과 서, 양쪽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목숨을 건 전화선 설치장면도 허구란다. 실제로는 동쪽으로 전화가 연결되어 있었고, 부사단장이 전화로 퇴각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와는 달리 부대가 건물에 진입한 후 곧바로 전등은 파괴했다고 한다. 사격의 목표물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 안전하게 별일 없이 다리를 건너 퇴각한다. 영화는 영화대로 그냥 보고, (중국인이라면 자기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면 될 것이다.
● 사진원, 역사가 된 군인
그런데, 이들이 다리를 건넌 뒤 어떻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이들은 중국군에 편제되어 다시 전투로 보내진 게 아니었다. 바로 영국군에 의해 구금된다. 일본군은 조계지에 경고한다. 중국군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진입할 것이라고. 사진원 지휘관은 영국 측에 무기를 내놓을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한다. 결국 장개석 정부의 설득과 영국의 술수로 이들은 무장해제되고 별도의 공간에 수용된다. 이들은 4년을 여기서 지낸다. 사진원은 이곳에서 부대를 통솔하고, 곧 나가서 전투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이지 역사는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장개석과 다투던 국민당정권의 왕정위가 일본과 손잡고 남경(난징)에 괴뢰정권을 세운 것이다. (이른바 남경국민정부이다. 이안 감독의 ‘색계’가 이때의 이야기임) 왕정위는 권력강화를 위해 명사들을 대거 끌어들이려 애썼다. 당연히 상하이 보위전의 영웅 사진원에게도 손을 내민다. 사진원에게 접근한 사람은 왕정위의 오른손이었던 진공박(천궁뽀). 진공박은 왕정위 괴뢰정권의 입법원장이자, 상해시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사진원은 이들의 제의, 회유를 단칼에 거절한다. 그리고 얼마 있다 이들의 사주를 받은 병사 넷의 습격을 받고 암살당한다. 일본군과의 공방전에서 살아남은 지휘관의 어이없는 죽음이다. 그때 나이 37살이었다. 사진원은 사후 소장으로 추서되었다. 기념비 자리에는 그를 기리는 모택동의 헌사를 만나볼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유튜브를 찾아보니 중국 CCTV의 다큐멘터리를 하나 찾아볼 수 있었다. 사진원 부사단장의 아들 (유복자로 태어난 넷째)과 양혜민의 아들이 함께 ‘사행창고’를 찾아 각자의 부모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 ‘800’은 1937년 10월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의 중국’이었기에 대만에서 당시 전투는 대만과 중국에서 수차례 극화되었다. 사행창고 보위전 전에, 그러니까. 일본군이 상해로 쇄도해 들어오는 것을 막은 바오산(寶山)전투에서는 요자청(姚子靑)과 600명의 군인이 7일동안 혈전을 펼치다 전멸했다. 이 이야기는 2017년 <한위자>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었다. 그 영화는 1,000만 위앤의 저조한 흥행성적을 올렸다. 차이가 무엇일까? 중국사람들은 알 것 같다. 여하튼 <한위자>는 OTT서비스 왓차에 <600결사대>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다.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로 극화할 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논쟁이 있었다. 아예 판타지로 갈 수 있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도 한다. 지금 중국영화판은 그렇게 자기들의 역사를 가공, 미화, 신격화하고 있다. 미묘한 시기에 개봉된 애매한 영화이다. 2020년 12월 10일 개봉/ 15세관람가 ⓒ박재환 2020//12/08
[사진 = 영화 '800' 스틸 컷/ 기록사진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