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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환 Oct 16. 2020

[에베레스트] 중국의 등산굴기

1960년, 중국등반대는 에베레스트정상에 올랐을까?

2019년은 중국이 건국된 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모택동의 공산당이 장개석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마침내 대륙을 석권한 것이다. 수천 년 봉건체제에 신음하던 인민을 해방하고 대국굴기를 부르짖는 중국에서 작년 그들의 국경일을 기념하여 대작영화 3편이 한꺼번에 개봉되었다. <중국조종사>(中國机长),<나와 나의 조국>(我和我的祖国 ), 그리고 <에베레스트>(攀登者)이다. 세계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중국어로는 珠穆朗玛峰)를 왜 영화로 만들었을까. 


 영화는 1960년과 1975년에 있었던 중국 산악등반대의 에베레스트산 도전을 담고 있다. 에베레스트산은 1953년 5월 29일,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가 처음 등정에 성공한 뒤 크라이머들의 도전의 무대였다. 네팔의 남쪽 경사면을 통한 등정이 아니라 중국(티벳)의 북쪽능선(노스 슬로프)을 이용한 도전이었다. 세찬 눈보라 등 악천후 속에 등반대원들은 ‘조국의 영광’을 위해 한 발 한 발 전진한다. 마침내 대장 방오주(오경) 등 세 명의 중국인들이 정상에 우뚝 서서 오성홍기를 휘날린다. 실제 정상에 오른 인물은 공푸(貢布), 왕푸저우(王富洲), 취인화(屈銀華)였다.(1960.5.25.) 그들은 영예롭게 하산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정상정복’에 대한 사실을 의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중국정부는 다시 한 번 에베레스트 정복에 나선다.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의 새로운 출발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두 번째 도전은 성공할까. 기록은 남길까.


 ‘신생국가’ 중국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하는 것은 명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천 년 봉건체제를 박살내고 공산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열의를 넘칠 때, ‘건국 10년’에 걸맞은 이벤트로 에베레스트 정복을 준비한 것이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도움을 받아 고산 등정을 준비하다가 소련과의 분쟁이 시작되고 결국 자력으로 도전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산을 둘러싸고 네팔과 국경선 획정문제가 걸려있었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른 세르파 텐진 노르게이는 네팔 사람이었다. 네팔은 중국에게 “너네들 꼭대기에는 올라가 봤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영화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 분투하는 등반대원의 힘든 도전을 ‘중국에 걸맞은 CG효과’로 극한 체험을 보여준다. 흔한 산악인들의 불굴의 의지와 함께 중국 인민들의 넘쳐나는 애국애족심의 발로를 눈사태와 함께 보여주는 셈이다. 


 실제 중국은 1960년 등정에 성공했을까? 영화에서는 눈사태가 일어나며 카메라를 휩쓸려버리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지만 산악인들은 여러 가지 사실로 그들의 등정사실을 확신한다. 그럼 영화에서 보여준 1975년의 등반은 사실일까?


 이는 영화적 판타지가 가미된 것이다. 실제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휩쓸고 간 뒤, 다시 한 번 에베레스트 산 등반에 나섰다. 그런데 실제 두 번째 정상에 오른 것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런 팀이 아니었다. 정상에 우뚝 선 사람은 모두 9명이었고, 여성산악인 판두오(潘多)도 포함되어 있다. 판두오는 에베레스트에 오른 최초의 중국여성으로 기록된다.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최초의 여성산악인은 일본의 타베이 준코(田部井淳子)이다. 판두오보다 열흘 먼저 정상에 올랐다.


중국영화 <에베레스트>는 끝까지 영화적 판타지를 다룬다. 1975년의 두 번째 등정에 참여했다 눈사태와 강추위 속에 겨우 구출되고, 동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한 인물이 나온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그 남자가 의족으로 정상에 우뚝 서는 모습이 그려진다. 특별출연한 성룡이 그 남자를 연기한다. 


2015년 개봉된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감독의 동명의 영화 <에베레스트>는 1996년의 에베레스트 재앙을 그렸다. 그해 그 산에서는 유난히 많은 조난사고가 일어났었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에베레스트가 예전같이 정통적 산악인의 꿈의 목표가 아니라, ‘누구나, 돈만 많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익스트림 스포츠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의 기업가들 사이에 에베레스트 등반 붐이 일기도 했다. 가장 위험한 코스는 헬리콥터로 가뿐히 가로지른 뒤 마지막 베이스캠프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는 방식이다. 정상에서 중국기업의 호연지기를 자랑하는 PR전략이었던 셈이다. 씁쓸하지만.


중국 산악인은 이후에도 숱하게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다. 1988년에는 츠런두오지(次仁多吉)가 무산소로 정상에서 99분을 체류했었고, 2008년에는 산꼭대기에서 베이징 올림픽성화를 자랑하기도 했다. 올해(2020) 들어서는 코로나사태로 네팔 쪽에서의 정상도전이 뚝 끊어진 상황에서 지난 5월 중국팀이 자기들 코스로 다시 한 번 정상에 올랐다. 산의 높이를 다시 한 번 측량하는 등 과학적 탐사를 위해서였다. 중국정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국판 GPS(위성항법시스템)인 베이더우(北斗)를 활용했다고 한다. 


중국이 최근 측정한 산의 높이는 변함없이 8848미터였다. 이 높이는 해발고도이고, 눈이 덮인 상태(雪高)의 측량치이다. 수만 년의 세월동안 쌓이고 얼어붙은 얼음의 두께를 제외한 암면고도는 8844.43미터란다. 정상의 얼음두께가 거의 4미터에 달한다는 말이다. 


 영화 <에베레스트>는 중국건국 70년에 맞춰, 불굴의 중국 산악인들의 꺾이지 않은 도전을 그린 국책영화인 셈이다. 그 점만 알고 보면, 그리고 주인공 오경과 장쯔이의 멜로 라인을 적당히 넘어간다면 산악영화의 호쾌함과 도전의 정신을 맛볼 수 있는 호쾌한 영화인 셈이다. 


참, 세르파는 히말라야산맥을 근거지로 분포하는 소수민족이다. 중국, 네팔, 부탄, 인도에 걸쳐 약 15만 명에 이른단다. 중국의 경우 시장(西藏)에 1천여 명이 거주한다고. 텐진 노르게이 이후 세르파는 에베레스트 전설의 또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정상에 가장 많이 오른 민족이며, 무산소등정기록도 가장 많이 갖고 있으며, 또한 가장 많이 조난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참, 찾아보니 그동안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는 사람은 1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작년의 경우 891명이 정상에 발을 밟았고 11명이 조난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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