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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드리히 니체 Apr 22. 2022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우주는 한순간도 쉬지 않는다. 매 순간 별이 죽고 별이 탄생하며 물질이 분해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바쁘고 어지러운 출근시간의 지하철을 생각해보라. 우주는 그 어느 곳보다 가장 혼란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우주는 바쁘다고 하기에는 너무 고요하다. 매 순간 별이 죽고 태어나며 물질이 붕괴되고 생성되는 우주는 우리에게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불과하다. 어째서 우리는 우주의 고요한 면만 보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보이저 1호로부터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이저 1호의 여정


보이저 1호_ 출처 : NASA/JPL-Caltech


    보이저 1호는 1977년, 태양계 외행성 탐사 목적으로 발사되었다. 이후 보이저 1호는 약 3년의 항해 끝에 성공적으로 목성과 토성을 탐사했다. 당시 보이저 계획의 화상팀을 맡았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지구로부터 출발한 인공물 중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보이저 1호의 위치에서 태양계의 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했다. 초기에 그의 제안은 거부되었지만 이후 제안이 극적으로 통과되며 보이저 1호는 태양계의 사진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창백한 푸른 점


    창백한 푸른 점은 1990년 2월 14일, 지구로부터 약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 사진이다. 보이저 1호는 지구를 포함한 6개 행성 사진을 60장에 나누어 찍었는데 이를 ‘가족 사진’이라고 한다. 창백한 푸른 점은 가족 사진 속의 지구 사진 낱장의 제목이다.


창백한 푸른 점_ 출처 : NASA/JPL-Caltech


    창백한 푸른 점은 사진의 제목인 동시에 지구를 의미한다. 사진 속의 지구는 암흑 속의 모래 알갱이 한 알의 크기보다 작다. 사진에 찍힌 지구의 크기는 고작 0.12 화소에 불과하며 나머지 공간은 태양광 몇 줄기와 암흑으로 보이는 빈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창백한 푸른 점은 보이저 1호의 시야에서 지구가 태양과 너무 가까운 이유로 좁은 앵글로 촬영되었다. 사진에서 지구 위를 뻗어나가는 광선은 실제 태양광이 아닌 보이저 1호의 카메라에 태양광이 반사되어 나타난 우연한 효과다.


    창백한 푸른 점에 묘사된 압도적인 빈 공간과 그 속의 푸른 점 하나는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사진 촬영을 제안한 칼 세이건도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이후 그는 그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에서 사진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령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 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들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를 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아주 맑고 어두운 ,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운이 좋다면 우리는 수많은 별들을   있을 것이다. 우리 인류는 역사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가   있는  별들의 영역이 우주의 전부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맨눈으로 관측할  있는 우주는 우리 은하의  1% 불과하다. 현대 인류의 술로 관측 가능한 우주 범위 내에서만 최소  천억 개의 은하가 존재할 것이라 추산한다. , 우주는 우리가   있는 영역보다   없는 영역이  넓다는 의미이다.  사실을 염두에 두면  순간 끊임없이 사건들이 일어나는 우주가 우리에게는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유를 얻을  있게 된다. 우리는 우주의 혼돈을 목격하기에 너무나 작고 근시안적이며 동떨어진 곳에 있다.


    지난  천년  인류는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어왔다. 생각해본다면, 인류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계곡에는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흘러 우리가 목을 축일  있었으며 땅은 우리가 일용한 양식을 맺었다. 낮에는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거대한 불덩이가 있었고 밤에는 우리가 외롭지 않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고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를 해주는 작은 빛들이 하늘에 떠있었다. 우주는 인류를 위해 존재함이 분명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사고였다. 인류 없는 우주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인류 없는 우주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과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우주론에 대한 대중의 인식 또한 점차 변했다. 지금에 와서 우주가 오직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우주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상당히 구시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당연히 인류를 위해 우주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잠재되어있다. 자신이 우선이며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거만함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인류에게 봉사하는 우주'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창백한 푸른 점 앞에서 근거를 잃는다.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 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인류가 사라져도 세상은 물리적으로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지구는 여전히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보이저 1호는 성간 구역을 항해할 것이다. 들판의 양은 여전히 풀을 뜯을 것이며 한강의 물고기는 여전히 헤엄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불쾌하게 하지만 보이저 1호가 우리로부터 약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찍은 우리의 사진은 이러한 주장의 아주 훌륭한 근거가 되어준다.


창백한 푸른 점 (리마스터)_ 출처 : NASA/JPL-Caltech


    우리의 존재가 우주에 주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사실—우리가 우주의 존재 유무와 무관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쉽다. 이것은 우리가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존재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우주에 흔적조차 남기는 것이 무의미하고 허무하듯 보인다. 우리가 지구에서 아무리 위대한 존재가 되어도 한낱 작은 점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기억되는 것이 정말 의미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인류가 이러한 허무함에 잡아먹혀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목표로 보이저 1호가 창백한 푸른 점을 찍은 것은 아닐 것이다. 창백한 푸른 점은 우리들이 이 사진을 보고 무엇을 하던 무가치하고 의미가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창백한 푸른 점은 우주에서 우리 인류의 위치만 알려줄 뿐, 우리더러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성취하라고 지시하지는 않는다. 창백한 푸른 점을 보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우주에서 작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도 우리다. 우리의 삶은 우주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닌 삶을 직접 경험하고 스스로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우리에게만 의미 있다. 저 먼지 같은 작은 점은 우리의 삶의 주체는 우리라고 인류에게 시사하고 있던 것이다.


    이제 창백한 푸른 점을 다시 한번 보도록 하자. 우리의 삶은 우리만이 누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푸른  바깥의 거대한 공허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되,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두지 말자. 오히려 압도적인 암흑에 비해 보잘것없지만 소중한 푸른 점에 집중해보자. 작은 푸른  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쩌면 인류는  작은 푸른 점에 비해 우주가 이렇게 광활하니 마음껏 우주를 개척해야  것이다. 혹은 아직 끝내지 않고 미뤄둔 과제를 마저 해야  수도 있다.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맞추지 못한  집에 방치해둔 퍼즐을 마저 맞출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로부터 60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창백한 푸른 '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수신하고 해석하는 것은 우리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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