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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희 노무사 Feb 21. 2023

무아와 상월결사, 그 모순 앞에서

상월결사는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가 아닐까? 부디.. 불기자심!

붓다 가르침의 세 가지 특징(삼특상)은 무상, 고, 무아이다.


"무아"는 "오온무아"를 주로 말하는데, 색수상행식(오온)으로 이루어진(형성된) '나'는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형성되었다) 사라지기에(멸하기에)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닌, 조건발생으로 인한 가합상태라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조건이 사라지면 해체된다는 뜻이다.


세상과 우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근(안이비설신의)이 6경(색성향미촉법)을 만나 6식(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이 일어날 뿐인 현상이므로 삼사화합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인 연기적 존재를 두고 자아라고 할 수는 없기에 "무아"라는 것이며, 생로병사 등으로 대표되는 '나'의 고통을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에 "무아"라는 것이다.


또한 "무아"는 무상(끊임없이 변하는 이치)하기에 "무아"일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기억해야 한다.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데, 거기에 '고정된 자아'가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주로 고통을 느끼는 것은 무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므로 무상으로 인해 '고'가 일어난다고도 할 수 있다. '고'는 '불만족'을 의미하는 것인데, 불만족은 주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움켜쥐기 때문이다. 흘려보내지 못하는 그 집착! 애착!!


템플스테이 하던 중 "묵언"


그렇다면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짓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여 계속 재생(윤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자아라고 여기고, 그로 인해 짓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조차도 자아라고 굳게 믿으면서 평생 '나'를 움켜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붓다는 '자아의 해체'인 "무아"를 설하셨는데, 초기경전 번역을 하고 계신 초기불전연구원(원장 대림스님)의 각묵스님은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설한 붓다 가르침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해체해서 보기

무상-고-무아

염오

이욕

해탈

구경해탈지


바로 이처럼 해체가 핵심인 것이다. 자아의 해체!


해인사 구광루에서


붓다는 괴로움(불만족, 4고 및 8고)과 괴로움의 원인(무명과 갈애)과 괴로움의 소멸(열반=해탈)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팔정도=중도)을 설하셨는데, 이러한 사성제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연기의 순관)와 소멸구조(연기의 역관)를 의미하며, 삼세양중인과를 통해 윤회(재생)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연기 중에서도 12연기의 순관, 즉 괴로움의 발생구조는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인데, 괴로움의 소멸 역시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즉 삼세에 걸쳐 두 번의 인과를 보여주면서 윤회의 원인을 무명과 갈애로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송광사 불일암 입구에 들어서면서 본 풍경


그렇다면, 이렇게 연기적으로 존재하므로 "무아"이고, 끊임없이 변하기에 "무아"이며,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에 "무아"인 붓다의 가르침은 대승불교에선 어떻게 구현되어야 할까?


상구보리 하화중생~

위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는 결국 "무아"의 지혜를 터득하여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산다는 것에 다름 아닌데, 이는 자아가 해체될 때만 가능할 수밖에 없다.


'나'가 펄펄 살아있는데, 어떻게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인가?

중생구제는 자아의 해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아를 움켜쥐는 한, 진정한 중생구제는 불가능한 일인 것!


'나'가 있으면 '너'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분별심은 저절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이러한 분별심을 바탕으로 한 모든 행위는 '함이 없는 함'이 될 수 없다.

자기 행위에 집착하여 '나'가 살아있는 모든 행위는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이러한 모든 노력은 붓다의 가르침과는 무관하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인사 내 사유의 공간(내가 이름 붙인 곳)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성현들은 자기를 완전히 해체시킨 자들일 수밖에 없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스스로 자아의 해체(=무아의 구현, 즉 사랑의 실천)를 보여주었으나,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붓다는 당연히 그가 발견한 진리대로 과거의 무수한 전생을 거쳐오면서 자아의 완전한 해체(자기의 완전한 보시=중생구제=무아의 구현)를 보여주었는데, 붓다의 제자들인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자기가 펄펄 살아있어 끝없이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면서 자기와 자기의 행위에 집착하고, 심지어 자기를 속이고 남도 속이는 행위까지 계속하고 있는 자들이 과연 붓다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름에, 개념에, 언어에 집착하는 한 고통의 소멸(=깨달음)은 없다.

우리가 이번생에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난 의미를 살리려면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 않고 갈애를 소멸시켜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금 인도에서 하고 있는 조계종단 일부 스님들과 신도들의 상월결사 인도순례는 한마디로 이름에 집착하는 행위이고,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한 이벤트가 아닐까?


세간에서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했던 00 스님을 종정으로까지 만들기 위한 기획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인데, 이러한 행태야말로 붓다 가르침의 핵심인 "무아"에 위배되는, 자기모순이 극대화된 (자기를 속이는) 행위가 아닐까?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 장경각 입구


불기자심!

2003년 어느 봄날, 성철스님 주석하셨던 해인사 백련암에서 첫 번째 삼천배 후 받은 성철스님의 글씨!

법명과 일원상과 함께 받았었는데, 지금까지도 삶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지금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하고 있는 스님들께 묻고 싶다.

스님들께선 "불기자심"하고 계신지 말이다.

만일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여왔다면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어차피 자신의 양심과 수치심에 비추어보면 답이 나올 것이고, 온 우주가 이미 다 알고 있어서 숨길 수 없다는 것도 알 것 아닌가!


해인사 축구장


송담스님의 조계종 탈종사태에 이어 많은 수승한 스님들이 조계종을 떠나고 있다.

이미 조계종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가는 스님들이 많으며, 붓다 가르침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수행공동체들이 하나, 둘 조계종을 버리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붓다의 재가제자들이 조계종 보시거부운동을 하거나 조계종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저 홀로 수행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사실, 난 이미 마음속에서 조계종을 떠나보내기 시작했다.

현재 나는 그저 붓다의 가르침이 좋고, 우리의 오래된 절집들(해인사와 같은...)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영월 창령사터에서 발견된 오백나한 중 "수행하는 나한"



아.. 언제쯤 제정신을 번쩍 차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될까?

파사현정의 마음으로 자기를 보고, 조계종단을 지켜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글을 쓸 자격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부끄럽지만... 쓴다.


_()_



8년쯤 전 지인이 그려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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