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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Nov 13. 2016

이별의 온도

이별을 마주한 저마다는 그 때를 반추하는 시감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아릿한 물기의 짠내로, 또 누군가는 째진 햇빛 사이 멀어지던 그린 이의 초록색 티셔츠로. 나의 경우는 온도였다. 그것도 참 엉뚱‘배가 시리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이 내 이별의 촉감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계절의 변화와 함께 별거 없던 연애가 무겁고 버거운 것이 돼 갔다. 가장 예뻤던 벚꽃의 계절을 지나 텁텁한 무더위가 왔을 때 우리의 감정도 서서히 숨을 삼켜만 갔다. 그리고 비로소 쌀쌀한 바람이 묻어날 무렵 그렇게 함께 쌓아왔던 모든 시간이 거짓말처럼 찬 공기 속에 묻어져 갔다.

 

따뜻한 이별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세상 모든 이별이 시린 온도라면 왜 그토록 헤어짐이 그리운 시간들에 대한 갈망을 더욱 돋우는 지를 단번에 설명할 수 있을 게다. 함께라는 이름의 따뜻함. 추운 겨울 손끝의 온기를 끌어 모아 하얀 입김 사이로 소중히 나누고 또 나누던 훈김의 시간을 미련한 몸이 계속 기억하는 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의미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나만이 홀로 존재하던 세상의 반쪽을 어느 새 다른 이와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 그렇기에 이별은 온전히 하나로 돌아오는 여정이 아니다. 여전히 뚝 떼어진 반쪽짜리를 마주해야 하는 쓸쓸한 귀로. “예전에는 어떻게 혼자 멀쩡히 지냈는지 모르겠어.” 때때로 이별의 순간마다 이런 질문을 마주하는 이유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도 몇 번을 더 나의 반쪽을 떼어내 시린 배를 움켜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떼어내고 또 떼어내다 보면 온전한 내 세상이란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그렇게 한없이 차가워진 배를 만지며 더 이상 온기를 그리는 것을 포기하게 되고 마는 건 아닐까. 아직은 당장의 잃어버린 반 시림을 견디기도 급급한데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또 다시 차가워진 바람에 잊었던 서늘한 촉감이 올라와 덜컥 겁이 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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