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과 폭력을 주는 외부에 대응해 그는 구원의 방법을 설계하고 실천한다.
이름이 영희다. 우리 시대엔 교과서에 실린 흔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요즘 시점엔 그 흔함으로 인해 웬만해선 한 집안의 딸에겐 붙여주지도 않을 옛스런 그런 이름이다. 그 이름을 붙여준 의미는 짐작이 된다. 특별하지 않음, 개성을 부여하거나 애정을 불어넣진 않을 대상이라는 규정. 이런 극 중 영희에게 흘려보내는 작품 속 사람들 시선의 기준선 자체가 그랬고, 그 가혹함은 극이 진행될수록 수위가 위험하게 올라간다. 얼굴에 멍이 여기저기 부었어도 실종되었다 발견한 동무의 장례식에서 그 상태로 조문을 해야 한다. 그러기까지 위해 그는 동무들에게 숱하게 발로 걷어차이고 밟히고, 아마도 선생님들 같은 성인들에겐 뺨을 숱하게 맞고 지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겐 가혹한 여학생 수난사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장면의 전시로 끝났다면, 애초에 관람을 주저했던 난 관람을 끝까지 후회했겠지만 이후의 국면은 본작을 다른 것들과 구분 짓게 하였다. 누구도 애정을 주기 힘들고 섣불리 감싸며 지지를 해주기 힘든 이 주인공은 과연 병든 시대, 구원 없는 요즘 세대의 대속자가 될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영희가 숙고 끝에 선택했을 ‘결정적인 방안’으로 이야기의 결이 일순 달라진다. 손가락질하던 동무들, 직접 손을 댄 동무들, 이야기를 유포하던 동무들, 방관하던 동무들 이들 모두의 관계성이 역전되거나 희석되거나 뒤바뀌는 일이 발생한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던 영희의 언어는, 영희 자신이 언어를 쓰지 못할 지경에 들어서자 역으로 영희에게 가장 큰 힘을 부여하고 한 여학생의 실종과 사망 당시 암울했던 참상의 교실은 안온하고 기이한 평화로운 참상으로 변모한다.
음성언어 대신 다른 언어를 택한 영희가 모든 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차라리 종교적 선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죄 많은 소녀’ 영희의 이 선언은 존엄하게 지속하지 못한 채 실천의 단계에서 신속하게 실패한다. 학교 속 어른들의 역을 맡은 배우들이 모두 관성적이고 바보같이 연기하는 동안, 유재명과 더불어 유일하게 어른의 연기를 보여준 서영화(경민의 모친 역)는 전능한 선언의 예상치를 벗어나 전능 자체를 훼손한다. 그래. 영희는 실패했다. 실천하지도 못했고 가장 근사하게 그리던 파국의 조감은 어긋났다. 굽은 다리 밑을 홀로 걸으며 어둠 밑으로 영희는 어둡게 사라진다. 죗값에서 한 톨도 덜어내지 못한 채. 구원의 방법을 스스로 구상하고 택한 아이는 마지막 한끝의 실천 바로 앞에서 주저앉아 어쩌면 자신의 실종을 택한 듯...
- 선우정아가 맡은 음악은 예상을 가볍게 넘는데, 특히나 베이스를 잘 살린 극장에서의 관람이 유효할 듯하다. 이젠 그러기 쉽지 않겠지만.
- 여학생 개별에 대한 묘사 및 극의 전환을 이루는 사건 이후의 잔가지를 뻗은 이야기들의 전반적인 조율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