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산책 시즌6 오픈세미나 요약
2026년 1월 22일 저녁,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연구탐사대의 '철학산책 시즌6' 오픈세미나를 위해 온라인에서 모였습니다. 철학을 한 번도 공부해본 적 없는 분, 지난 시즌부터 꾸준히 함께해 온 대원,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보고 신청한 분까지—각기 다른 이유로 모였지만,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은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나는 왜 이 문제를 연구하는가'
오픈세미나는 연구탐사대의 짧은 소개로 시작됐습니다. 5년간 연구탐사대를 이끌어 온 우리는 사유를 이야기하기 전, 먼저 질문을 던졌습니다. 좋은 연구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이론적 깊이와 방법론의 정교함을 기준으로 삼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연구자가 진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론과 방법론을 관통하는 사유의 축이 필요합니다. 이걸 관통하는 축이 없다면 진정한 해결에 닿을 수 없다는 걸, 5년간 연구탐사대를 운영하면서 느꼈어요. 그 사유의 축을 훈련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다가 철학 스터디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심보은 연구탐사대 공동 운영자)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사유의 대가라면, 그들의 사상을 재료 삼아 내 생각을 깊이 훈련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철학산책이 존재하는 이유였습니다.
본격적인 발제는 연구탐사대의 민경인 파트너 대원님이 진행해주셨습니다(철학산책 공동운영). 과학사회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행정학 박사과정을 새로 시작한 경인님은 10여 년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순수 철학을 공부해 온 폴리매스예요. 이날 발제의 출발점은 '나는 무엇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세미나는 찰스 테일러의 현대성 개념으로 시작했어요. 현대성의 두 특징 — 내면성(Inwardness)과 평범한 삶을 긍정하는 자아(Affirmation of Ordinary Life)— 이 두 가지가 우리가 '나'를 인식하게 된 토대라고 했습니다.
"빨간 코끼리를 생각해 보세요. 다들 떠올릴 수 있죠? 그 빨간 코끼리는 어디에 있나요? 머릿속, 상상 속이죠. 바로 이게 내면입니다."
(민경인 파트너대원)
발제는 라캉의 RSI — 실재계(Real), 상징계(Symbolic), 상상계(Imaginary) — 로 이어졌습니다. 실재계는 매 순간 넘쳐 흐르는 감각적 현실, 상상계는 그것을 떠올리는 이미지, 상징계는 그 둘을 언어로 연결하는 세계라고 했어요.
"물컵이라고 말하는 순간, 실재와 상상이 다 사라지고 물컵이라는 단어 안에 딱 붙습니다. 그래서 라캉은 말했죠 —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순간부터 부모의 욕망이 자신의 내면에 구조화되기 시작해요.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민경인 파트너대원)
라캉의 이론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언어가 실재를 대체하는 과정
우리가 "물컵"이라고 말하는 순간, 실제로 눈앞에 있는 물리적 사물(실재계)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상상계)는 사라지고, "물컵"이라는 언어 기호만 남습니다. 언어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해서 소통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실재의 풍부함을 제거하는 역할도 합니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의미
아이가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부모나 사회가 사용하는 언어 체계를 내면화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착한 아이"라고 말할 때, 아이는 단순히 단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부모가 원하는 "착함"의 기준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문제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과 타자(부모, 사회)가 원하는 것의 구분이 흐려진다는 점입니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이 정말 내 욕망인지, 아니면 부모나 사회가 가치 있다고 말한 것을 내가 욕망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왜 이것이 문제인가
라캉이 지적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타자의 구조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내 내면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외부에서 주입된 언어 구조일 수 있기 때문이죠. 발제자가 말한 "낯선 세계를 접하고 뱉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새로운 철학적 언어, 새로운 사유 체계를 접하면서 기존에 내면화된 언어 구조를 의식적으로 흔들고, 다시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구조화된 타자의 언어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낯선 세계를 접하는 것, 그리고 뱉어보는 것"이라고 했어요.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오픈세미나의 마지막에서는 드라마〈녹두꽃〉의 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한복판에서 한 인물이 외치는 장면이었어요.
"사람은 왜 사람이고, 사람 밑에 사람은 개 돼지나 다름없었잖아. 겨우 몇 달이었지만 사람이 동등한 시선 속에 살다 보니까, 기깔나서 다른 시상에서 못 살겄더라니까. 사람처럼 죽겠다 이 말이여."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이 사상이 한국 근대철학의 시초라고 합니다. 서양 철학이 자기 자신과만 대화하는 나르시스의 역사였다면, 한국 철학은 관계 속에서, 함께함 속에서 시작됐다는 것이었어요.
"김상봉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한마디로 나르시스의 역사가 아닌가 한다. 자기 자신과만 대화할 줄 알았지, 타자와 대화할 줄 몰랐던 역사다. 반면 동양 철학은 서로 주체성입니다.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죠."
(민경인 파트너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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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이 실학으로 백성의 삶을 기록했고, 함석헌이 씨알사상으로 고난받는 민중 안에서 생명의 본체를 발견했습니다. 한국 현대철학을 관통하는 물음은 결국 하나였어요. “이 사유가 지금 이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가”
세미나에서 남긴 질문은 단순하지만 깊었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며 내 안에 구조화된 타자의 욕망 아래, 나의 진짜 욕망은 무엇일까. 그리고 사회문제 연구자인 나는 왜 이 문제를 연구해야할까. 철학산책은 이 질문들을 함께 사유하는 자리입니다. 한국현대철학자들의 사상을 재료 삼아 내 생각을 꺼내고, 언어화하고, 동료들과 나누는 훈련의 장이에요. 이론을 암기하는 게 아니라, 그 사상을 거울 삼아 연구자로서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철학산책 오픈세미나를 시작으로 1월 31일, 한국현대철학을 중심으로 철학산책 시즌6을 시작했습니다. 상, 하편으로 나뉘어진 이번 시즌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철학산책 시즌6(상) 오픈세미나 보러가기
현재 철학산책 시즌 6 (하)편을 추가로 합류할 대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s://pwalk.naioth.net 을 참고해주세요.
- 시작일: 3월 28일(토) 8AM - 10AM, 온라인
- 오픈세미나(무료) 신청하기: https://tally.so/r/J9lR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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