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망하지 않을까? 언론이나 탈북자들을 통해 밝혀진 북한의 실상은 처참하기 그지 없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23년 북한의 1인당 국민 소득은 약 159만원으로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인 약 4,730만원의 1/30에 불과하다. 2023기준 전세계 190개 국가 중 179위 정도로 추정된다.
그 얼마 안되는 국민소득 역시 추정치에 불과하며,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5%를 차지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크며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양만 다른 세계처럼 압도적으로 잘산다고 하니 추정컨대 다수의 북한 주민들은 통계 추정치보다 훨씬 더 가난한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들 대부분은 주로 아프리카 빈국으로 끊임없는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내전이나 반란 세력 없이 안정적인 김씨 일가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다. 남한의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형벌에 처하기도 하는 나라인지라 내부에서 불만이 고조될만도 한데, 이렇다할 갈등 없이 북한 체제가 계속 유지되는 이유는 혹시 김씨 일가와 그 주변 엘리트들이 만들어낸 독자적인 감시 기술 덕분일까?
사실 북한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대립, 그리고 현재의 미국과 중국 간의 대립 관계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론이 있다. 즉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 입장에선 남과 북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강대국들의 3차대전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정 상태라는 의미다. 전세계 강대국들은 이렇게 충돌 가능성이 높은 곳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국가들을 뒤에서 밀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서방 세계가 우크라이나를 밀어주는 것도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직접적인 충돌을 우크라이나가 완충 역할로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완충'이란 말의 영어 단어는 buffer이다. 국제 관계에서 완충 지대의 기능은 완충 역할을 하는 해당국 주민들에게는 비극일 수 있지만, 사실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매우 필수적이라 볼 수 있다. 유럽에서 수없이 많은 전쟁이 벌어지고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전래 없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 역시 당시 유럽 강국들 간 완충 지대가 사라졌던 이유도 한 몫 했다.
우리 몸 역시 생존을 위해 혈액을 비롯해 각종 체액 속에 완충 역할을 하는 물질들이 있다. 주로 산성 / 염기성 상태가 크게 변하지 않도록, 즉 혈액을 비롯한 체액의 pH가 크게 변하지 않도록 해주는 물질들이 바로 생리학적 완충제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완충제가 없다면 우리가 숨을 쉬거나 내쉴 때마다 폐를 지나는 혈액의 산성도가 급격히 변하고, 산성 음식을 먹으면 혈액의 산성도가 급격히 변해 생존이 어렵다. 완충 기능은 르 샤를리에의 산/염기 법칙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A라는 분자에 수소 이온 H+가 붙어 있는 형태를 A-H 라 하면, 여기서 수소 이온이 떨어지면 산성이 된다. 하지만 이 때 산성 효과를 내는 수소 이온 H+이 더 첨가되면 (산성화가 진행되면) A 분자는 H를 다시 잡아 A-H 형태로 전환되어 수소 이온을 그만큼 줄어들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완충제의 작용 방식이다.
혈액을 비롯한 우리 몸의 체액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체액 속에 돌아다니는 H+ 를 잡아 가두는 역할을 통해 완충 기능을 하는 물질들이 많이 있다. H+ 이온을 직접 퍼내는 기능을 하는 기구도 있고, H+ 이온 여러개를 끌어당겨 몸에 붙이는 헤모글로빈을 포함한 여러 단백질들이 있으며 뼈 역시 H+이온을 잡아 몸의 산성도가 증가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국제 관계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국가들의 존재로 다양한 메커니즘에 의해 갈등의 폭이 줄어드는 것처럼, 몸 속의 다양한 완충제 덕분에 외부에서 이물질이 들어와 일시적으로 혈액 속 산성도가 변해도 금새 다시 정상 pH 범위로 돌아오게 된다. (정상 혈액 pH는 7.3~7.5) 참고로 몸의 수소이온 농도가 이보다 낮으면 대사성 산증이 나타나는데, 이는 우리 몸이 혈액 속 산성도를 조절하는 능력을 일시적으로 잃어버린 상태를 뜻하며 이로 인해 두통, 경련이 발생하고 심하면 혼수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그 정도로 몸 속 완충제의 역할은 생명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약에서도 완충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혈관 속에 직접 약을 넣는 주사제나 눈에 넣는 안약 등 액상 제재에 이같은 완충제가 들어간다. 이것은 약이 우리 몸 속에 들어와 산성도가 급격히 변할 경우 약의 효과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약들이 주위 산성도가 달라짐에 따라 약의 효과가 급격히 떨어지곤 한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완충 기능을 하는 용액 속에 약을 넣어 몸에 투여하게 된다.
약에는 화합물질 외에 단백질, 효소, 유전자, 세포 등등을 직접 사용하는 바이오 의약품이 있다. 코로나19 시절 과반 이상의 국민들이 맞은 코로나 백신이 바로 바이오 의약품의 한 종류에 속한다. 당뇨에 사용하는 인슐린이 대표적인 단백질 약이며, Xenpozyme 등 특정 효소 결핍 증상에 부족한 효소를 직접 공급해주는 약들이 효소를 사용하는 바이오 의약품에 속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위고비, 삭센다 등 비만 치료제 역시 일종의 단백질 치료제로 (호르몬 유사체) 바이오 의약품에 속한다. 언론에서 가끔 나오는 '줄기세포' 를 이용한 치료나 항암제 킴리아가 세포 치료제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고, 희귀질환 치료에 사용되는 1회 20억짜리 졸겐스마가 유전자 치료제에 속한다.
이러한 바이오 의약품은 생체 유래 물질 혹은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한 물질을 약으로 사용하는 것들을 뜻하는데, 대부분 먹는 약이 아닌 주사로 투여해서 빠르게 혈액 속에 넣게 된다. 화합물이 아닌 몸 속 유래한 물질인 단백질, 효소, 유전자, 세포들은 절대적으로 완충제가 필요하다. 애초에 몸 속에서 유래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물질들은 태생적으로 우리 몸 속 혈액이나 체액과 같은 완충 용액에서 생겨났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 물질의 약효를 유지하기 위해선 몸 속과 같은 완충 용액 환경이 필요하다는 원리도 성립한다. 코로나 백신을 주사로 맞았듯, 위고비나 삭센다 같은 비만 치료제도 주사로 맞는데 그 이유 역시 이것들이 모두 완충 용액이 필요한 바이오 의약품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이오 의약품을 개발후 환자 몸에 투여하기 위한 형태로 만들 때 이렇게 산성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완충제의 선정이 무척 중요하다.
직장에서 혹은 친구나 동호회 등등의 모임도 가만히 살펴보면 완충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 덕분에 서로 개성이 다르고 취향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오랫동안 모임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역할은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이들이 없어지면 금새 남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싸움이 생겨나는 것으로 그 존재가 부각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