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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Jun 20. 2021

나는 왜 쓰는가

브런치를 열기 전까지 오랫동안 쓰지 못했다. 글을 참 오래 쉬었다. 언젠가 다시 쓰리라... 내내 다짐했건만, 쓰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쓴다'는 행위가 어색해져만 갔다. 일을 하면서 항상 무언가를 '쓰기는' 했다. 무채색의 어휘들로 채워진 개조식 보고서. 트집 잡히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톤다운된, 영혼 없이 기계처럼 나열된 글자와 문장들이었다. 보고서를 읽고 쓰는 것 외에는 어떤 텍스트도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던 터에 다른 무언가를 감히 적을 수는 없었다. 몇 차례 시도했으나 써지지 않았다.

쓰고 싶은 주제가 없던 건 아니었다. 휴대폰 메모장에는 각종 상념의 파편들이 담겨 있다. 길을 걷다가, 샤워를 하다가,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했다. 때로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었다.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며 빛의 속도로 달아나는 단어들을 겨우 붙잡았다. 그러나 그 조각들을 글로 풀어내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가끔은 가만히 앉아 작은 화면 너머 적힌 단상들을 훑어보기도 했다. 막상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핵심 아이디어는 있지만, 이걸 어떻게 풀어내지? 예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A4 한두 장씩 잘만 쓰곤 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썼던 걸까?

말마따나, 한때는 글을 곧잘 썼다.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적었다. 그냥 쓰고 싶은 게 생기면 미친 듯이 썼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보다 잘 쓴다는 걸 알고, 여기저기서 필력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조금씩 신경이 쓰였다. 남들의 평가에 예민해질수록 글에 메세지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자랐다. 완벽한 글을 쓰고자 하는 욕심으로 작성과 퇴고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투입했고, 꾹꾹 눌러담은 문장을 하나하나 다시 읽고 고치는 과정은 지난할뿐 아니라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자연스레 점점 글을 멀리하게 되었다. 한 번 쓰면 너무 힘들 걸 아니까 아예 시작을 안 하는 것이다. 이건 글쓰기뿐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많이 드러난다. 고질병이다. 내려놓으려 노력해보았으나 잘 고쳐지지 않는다.

삶의 여러 문제들로 소진된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이라고는 스포츠기사 뿐이었고, 글을 쓴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과거 내가 느꼈던 건 사실 즐거움이 아니었던 걸까?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도 가끔은 이런저런 지친 마음, 크고 작은 깨달음, 그리고 나를 다시 일으켜세우고자 하는 다짐을 페이스북에 토해내듯 풀어냈다. 그러나 메모장에 저장된 채 언젠가 쓰여지길 기다리는 소재들의 부름에까지 응할 수는 없었다.

글쓰기는 나에게 더 이상 하고 싶거나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이었다. 빨리 내 생각을 펼치고, 깊이를 더하고, 책을 쓰고, 나를 알리고 싶은 욕구... 그렇게 글쓰기 본연의 재미와 즐거움은 욕망과 조급함에 먹혀버렸다.

텍스트가 읽히고 나서도 한참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글을 써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브런치 작가신청을 했다. 일전에 가입은 해두었지만 글은 커녕 로그인도 안 해서 휴면계정이 된 지 오래다. 새로운 마음으로 계정을 파고 신청서에 첨부할 글을 썼다. 뻑뻑... 했다. 문장과 문장이 연결이 되지 않고 호흡은 뚝뚝 끊겼다. 이 단어를 써야 하나, 저 단어는 쓸 데 없이 어렵지 않나, 이렇게 쓰면 없어 보이지는 않을까, 이건 너무 무겁게 가는 것 같은데? 고치고 또 고쳤다. 혹시라도 떨어질까봐. 작가신청에서 탈락한다는 건 정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녹이 많이 슬었구나, 글쓰기는 정말 습관이구나 싶었다. 하루이틀 기름 친다고 좋아지지는 않겠다,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막상 쓰기 시작하니 손이 아주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 이러다간 끝이 없겠구나 싶을 무렵, 최소 서너 개 정도는 완성해야지 했던 초기의 다짐을 뒤로 한 채 누더기처럼 닳은 두 편의 글을 보냈다.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답이 왔다. 합격이었다.

내친 김에 밀리의 서재 프로젝트에 응모를 해보기로 했다. 당선보다는 글쓰기 습관을 들이자는 목적이 더 컸다. 이번 프로젝트를 계기로 일단 '글'을 다시 시작하고, 매일 조금이라도 적으면서 글쓰기 근육을 키우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작가신청을 위한 퇴고와 필명 선정으로 잡아먹은 시간이 너무 많았던 탓에 남은 시간이 부족했다. 마감을 앞두고 매일 한 편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일주일 내내 글만 썼다. 쓰고 고치고, 쉬었다 고치고, 동시에 다음 글의 아이템을 선정하고 밑그림을 그렸다. 자발적 글감옥이었다.

지금은 띄엄띄엄, 짧게는 사나흘에서 길게는 일주일 내지 열흘에 한 편 정도 쓴다. 다행히 글을 다시 놓아버리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이것만으로도 성공이다. 하지만 글 쓰는 게 여전히 어렵다. 괴로운 퇴고 과정을 겪고 싶지 않아서, 읽히지 않는 글을 쓰는 게 짜증이 나서, 새로운 글을 시작하는 마음이 무겁다.

애당초 이렇게 단발적인 글을 적으려던 것도 아니었다. 책을 쓰려고 했다. 기획안 구성을 잡고 목차를 꾸렸다. 괜찮은 아이템이 여럿 있었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한 편의 글이 아닌, 한 권의 책을 쓴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큰 숙제로 다가왔다. 그리고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일상 에세이가 아니라 사회과학 서적을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집필에 앞서 먼저 많이 읽어야 했다. 많은 책과 기사, 논문 등을 접하며 생각을 더 정리해야 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글 쓰는 과정보다는 출간이라는 결과만을 바라보고, 그 이후의 커리어와 성과에 집착했다. 얼마나 걸릴까, 이걸 쓴다고 해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하기 싫어졌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예전부터 구상했던 두 가지 대주제가 있지만 둘 다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가벼운 글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어 여행에세이 컨셉을 잡아보았다. 그러나 역시 쓰지 않는다. 어디 가서 뭘 했다는 이야기만 적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더 담아야 할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엮어내야 할지는 모르겠다. 이럴 바에는 주제를 막론하고 짬날 때마다 한 편 한 편 쓰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다. 그게 브런치를 시작한 여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꾸 멀리 보게 된다. 이런 나를 가만히 살피다 보면, 사실 나는 글쓰기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 글쓰기가 재밌다고 느꼈던 건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나는 정말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최근 몇 년의 시간 동안 내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기에 여전히 글을 가볍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는 걸까? 확실한 건 글이 가볍게 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작가들이 글을 쓰는 동기로 생계를 제외하고 네 가지를 들었다. 유시민 작가가 풀어놓은 설명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그의 표현을 요약하여 옮긴다. 내적 동기를 파악하는 데 가장 좋은 분류법이라 생각해서 나 자신에게도 적용해보았다. 오웰이나 유시민을 언급하는 게 잘난 척이나 재수없어 보일 것 같아 가급적 피하려고 했는데, 이걸 적지 않고서 나의 내면을 마주하기엔 한계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

1.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똑똑해 보이고 싶고, 잘난 인물로 기억되고 싶은 욕구

2. 미학적 열정: 의미와 아름다움 추구

3. 역사적 충동: 진실을 후세에 남기려는 욕구

4. 정치적 목적: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유시민, 정훈이, <표현의 기술> 참조)

누구나 네 가지 목적을 공히 가지고 있겠으나, 그 우선순위나 비중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오웰과 유시민 모두 정치적 목적을 자신들이 쓴 글의 근간으로 삼고 있고, 그에 더해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나 역시 2번과 4번이 중요한데,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가 보면 1번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쓰고자 하는 사회과학 책은 당연히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고, 나에게도 그 책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풀어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런데 그런 저서를 통해 나 자신을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욕망은 어느 정도를 넘어서는 순간 글쓴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나의 문제는 이 욕망이 선을 넘은 것도 모자라 건강한 욕구(2번과 4번)마저 집어삼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우선 1번 욕구를 적정선 아래로 가라앉혀야 한다. 여전히 글을 구상하고 적을 때마다 이런 건강하지 못한 욕망에 휩싸이곤 하는데, 그 불길을 잠재우지 못하고서는 어떤 글쓰기도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나아가 진실로 글쓰기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계속 써야 한다. 퇴고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조금 덜 정제되었더라도 세상에 글을 내놓고, 몇 편의 글만으로 변화를 맞이하리라는 기대를 거두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욕망과 기대를 내려놓으며 두꺼운 자아의 껍질을 깨야 한다.

내 글쓰기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아름다운 방법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욕망은 잠잠하다가도 이내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듯 튀어나온다. 나는 그 이기적 욕망을, 내 삶의 건강한 추진동력으로 삼기 위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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