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탄생 비화
나는 20대의 마지막 언저리에 매달려 있었다. 유학 준비 중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 잡는 와중에 나는 이 나이 먹고 뭐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은 어리디 어리고 기회도 많았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정작 그 나이일 적엔 뭐 그런가. 인생의 주요 시기를 관통해나갈 때는 누구나 내가 가장 힘들고 이미 늦어버린 게 아닐까, 하게 마련이니까. 이 시기의 나는 정말 많이 조급했고 (그렇다고 30대 들어서 조급증이 사라졌냐 하면 절대 아님), 불안감에 휩싸여 매일 학원과 도서관을 전전했다.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는 이런 내 상황을 묵묵히 받아주고 지지해주었지만, 늘 무언가에 쫓기며 바쁘게 지내는 남자친구와의 연애가 항상 좋았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데이트도 주말에 짬을 내어 하는 마당에 이틀이나 사흘씩 여행을 가긴 어려웠다. 물론 깨어 있는 시간 내내 공부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책상을 비우는 것 자체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터라 어디를 며칠씩 놀러간다고 생각하면 부담감이 앞섰다. 이런 내 모습에 웬만해선 섭섭함을 내비치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어떻게 그런 감정을 항상 숨기는 게 가능할까. 평소에는 모른 척 외면하다가도 가끔씩 저도 모르게 배어나는 서운함을 발견할 때면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2011년 새해가 밝았고 시험이 아직 좀 여유 있을 때 며칠 놀러가자는 말이 나왔다. 이번에도 부담스러운 마음이 먼저 찾아오는 바람에 몇 차례 다툼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차마 내가 이길 수 없어서 결국 가장 가깝고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일본에 3박 4일 정도 다녀오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웬만한 국내 여행지(특히 남해안과 비교해보면 더)보다 쉽게 다녀올 수 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까지 1시간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 시기는 2월 말 즈음으로 정했던 것 같고, 장소는 도쿄? 오사카? 아니면 규슈 어딘가였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이왕 가기로 한 거, 그래 재미있게 다녀오자, 나도 사실 놀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리프레시가 필요하기도 하고, 즐겁게 여행하고 와서 더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여권을 신청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서초구청 여권과. 당시 강남역에 있던 학원으로 출퇴근할 때라 가장 가까운 구청을 찾았다. 졸업한 고등학교 바로 옆이라 익숙한 장소였다. 졸업 직후 이사를 갔고, 1년쯤 지나고는 나도 대학 앞으로 나가 살게 되면서 더 이상 근처에 올 일도 없었다. 거진 10년 만에 찾은 동네는 익숙하면서도 어색했다. 내가 기억하던 구청 건물은 뭔가 어른의 공간이랄까,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될 것만 같은 금지된 구역의 인상을 풍겼었는데,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 다시 찾은 그 곳은 그냥 민원과 서류가 오가는 딱딱하고 지루한 공적 영역에 불과하더라. 건조한 공간이었지만 공기는 눅눅했으며, 적당하게 마른 시멘트 냄새가 났다.
2011년 2월 17일. 여권 발급일이다. 내 생애 첫 10년짜리 복수여권. 어릴 때는 부모님이 만들어준 여권을 썼고, 성인이 되어서는 군 미필이라는 이유로 단수여권만 몇 차례 만들었다. 요즘은 미필이라도 복수여권 발급에 많이 관대해졌던데 예전에는 정말 얄짤 없었다. 여권을 신청할 때는 1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언제 10년이 지나려나, 그 날이 오긴 오는 건가 했다. 2021년이라니, 2010년대도 어색한데 2020년대라니, 진짜 말도 안 되게 멀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라는 공상과학만화가 있었는데, 설마 그 때쯤 우주여행이 가능해지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 날이 왔다. 아니, 여권은 이미 만료가 되었으니 지나버린 셈 쳐도 되겠다. 적어놓고 보니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게 오히려 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치 덤블도어 교수의 방에 몰래 들어가 펜시브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가 스네이프 교수에게 딱 걸린 기분이랄까.
여권도 받았겠다, 그렇게 출발을 기다리던 중 갑자기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할머니는 80대 중반이셨는데 몇 해 전부터 거동이 힘들어지면서 대전 막내삼촌(정확히는 작은 아버지인데 평생 입에 안 붙음)이 모시고 있었다. 당장 돌아가실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더구나 곧 환절기. 입원해 계신 병원에 자주 갈 수는 없었고 일상이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일본으로 여행을 갈 수는 없었다. 10년 전에도 일본은 가까웠지만 해외여행이 요즘처럼 가볍게 훅 떠났다 돌아올 수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일단 급하게 3월 중순 정도로 일정을 연기했지만 할머니는 조금 나아지셨다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했고, 아무래도 여행을 조금 미룬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취소. 내심 안도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마음 한 켠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부담감을 떨쳐낼 수 없었으니까. 이 여행은 애초에 안 될 일이었던 건가 봐, 라는 여자친구에게 차마 이 안도감만큼은 이야기할 수 없었다.
3월이 왔고, 여전히 공부와 씨름하고 있던 나는 그 날도 변함 없이 강남역 골목을 걷고 있었다. '지이잉' 하고 진동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진동 쓰는 사람 있나? 본 지 엄청 오래 된 것 같은데). 여자친구의 문자다. 쓰나미가 일본을 덮쳤단다. 바로 뒤이어 온 메세지, "아무래도 할머니께서 너를 구해주려고 하셨나 봐".
그 때만 해도 '스맛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각진 아이폰 4가 최첨단 하이테크 스마트폰이었던) 시절이다 보니 바로 소식을 확인할 길이 없어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었다. 그 문자를 받았던 순간 나는 강남역 11번 출구 근처에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 때도 11번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7번이었을지도) 지금은 없어진 놀부부대찌개 창문 안으로 보이는 TV뉴스를 보고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2011년 3월 11일, 거대한 쓰나미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를 덮친 날이었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여행기간이 3월 11일 즈음에 걸쳐 있었다. 며칠 되지도 않는 그 짧은 여행 떠났다가 현지에서 지진과 쓰나미를 맞이할 뻔 했으니.. 이거야 원, 세상 일 모른다거나 아찔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느낌이다.
가끔 이렇게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다. 마치 어른들이 자식이나 손주들을 위해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무언가를 남겨두고 가시는 듯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 정말 할머니가 나를 지켜주려고 하셨던 걸까. 쓰나미가 뉴스를 뒤덮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채 풀리기도 전에 할머니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셨다. 어떤 마음이셨는지, 정말로 나를 구해주고 싶으셨던 건지, 이미 의식을 잃고 계셨던 그 때도 10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일은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기억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빳빳한 새 여권은 서랍 어딘가에서 까맣게 잊혀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권 입장에서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무리하지 않고 체력을 비축해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이후로 온갖 코트와 재킷과 바지 주머니를 전전하며 입국심사원의 매서운 눈길을 마주하게 될 일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