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깃꾸깃 접혀 잊혀진 이야기들
나와 여권의 이야기
내년에는 여권 발급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서 새로 만들려면 장기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올해 미리미리 만들어두란다. 그러고 보니 내 여권도 유효기간이 지났다. 사실 진즉에 갱신했어야 했지만 잊고 있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작년에 재발급 신청을 했을 터다. 만료일이 올 2월이었는데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굳이, 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여권 발급 대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아마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은가보다.
마지막으로 해외에 나갔던 게 언제였더라. 2019년 8월에 다녀온 필리핀 출장이 마지막이었나 했는데, 글을 고치며 다시 생각해 보니 작년 1월에 베트남에 갔었다. 그 때만 해도 1년이 넘어가도록 비행기를 탈 일이 없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사람 일이란 역시 모른다.
당시 여권 만료까지 딱 1년 가량 남았는데 도장 찍을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아서 (정말 많이 돌아다니긴 했다) 그 전에 재발급을 받아야겠구나 생각했다. 일도 바쁜데 언제 구청에 왔다갔다 하나, 그럼 사진은 다시 찍어야 하나, 잘 찍는 사진관 은근 찾기 힘든데, 쌈빡하게 찍어주는 사진관은 언제 또 찾고 있냐, 기껏 갔는데 이상하게 나오면 어떻게 하지, 유효기간 만료 전에 갱신하면 지금 여권은 반납해야 된다는 말이 있던데, 설마 진짜 반납해야 하는 건가, 안돼 여기에 찍힌 스탬프가 몇 갠데, 여기에 내 지난 10년의 추억이 모조리 담겨 있다고, 음 그러면 그냥 만료될 때까지 기다릴까, 어떻게 대충 비비다 보면 버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음 근데 유효기간 6개월 미만 여권으론 출입국이 불가능하잖아, 그럼 출장도 못 가는데?
세상 세상... 별 씨잘데 없는 걱정이란 걱정은 미리 다 끌어당겨 하는 나라는 인간, 징글징글하다 진짜. 한 달 만에 몰아친 코로나라는 파도가 이 모든 고민을 삼키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삶의 모든 걱정이란 게 지나고 보면 대부분 그렇듯이. 생각난 김에 확인해 보니 유효기간 만료 전에 여권 갱신 신청을 하면 완전 반납이 아니라 구멍만 뚫어서 사용하지 못하게 한 후 돌려준단다. 이것도 그냥 검색만 한 번 해봤으면 될 일을. 제발 생각이란 걸 좀 그만 해라, 적당히 가볍게 살자, 아무리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해 봐도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하아,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떻게 하란 말이냐.
서랍 첫 번째 칸에 고이 잠들어 있는 여권을 꺼내본다. 작은 수첩처럼 생긴, 닳고 닳은 케이스만 봐서는 이제 여권인지조차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든 이 물건에 내 지난 10년이 담겨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100g, 아니면 200g? 삼겹살 한 근은 커녕 1인분 정도 되겠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 없고,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누가 마음만 먹으면 들고 갈 수도 있겠다. 한 순간이면 내 모든 흔적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묘하다. 1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고작 삼겹살 1인분에 불과할 수도 있다.
몇 개국을 다녔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여권을 한 장 한 장 들추다 보면 각국의 출입국 심사 스탬프와 비자가 (한국 여권으로 웬만한 나라는 비자 없이 들어갈 수 있지만, 그래도 필요한 경우가 왕왕 있다)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날짜도 찍혀 있다. 그 기록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당시 기억이 새록새록, 추억의 보물창고를 여는 느낌이랄까. 애초에 그 나라에는 왜 가게 되었는지부터, 비행기를 티켓팅하던 일, 비자를 받으러 현지 대사관에 찾아갔던 날의 풍경, 타고 내렸던 비행기 항공사의 마크, 공항 특유의 냄새, 비행기 문이 열리자마자 훅 들어오는 동남아 공항의 열기, 타원형 창문 밖으로 느껴지는 북부 유럽의 차가운 공기, 그리고 적당히 쩔은 채로 입국심사대 앞에서 백팩을 멘 채 차례를 기다리던 나의 모습까지. 현지에 살면서 여러 번 출국과 입국을 반복했던 곳이라면 도장 하나하나에 새겨진 기억이 바뀌어 있기도 하지만,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의 궁전을 뒤지다 보면 이내 제자리를 찾아내고야 만다.
요즘은 출입국 스탬프를 찍어주는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 아쉬울 따름이다. 인천공항은 언젠가부터 출국 시에만 도장을 찍어주더니, 또 언젠가부터는 그마저도 없애 버렸다. 고것 좀 찍어준다고 줄이 엄청나게 늘어서지는 않을 텐데, 인천공항만큼 빠르고 쾌적한 공항도 또 없는데, 괜시리 야속한 마음이 든다. 여권에 한 번이라도 흔적을 더 남기고 싶어서 도장을 찍어주는 동안은 일부러 자동출입국 심사도 신청하지 않았더랬다. 사람들이 자동심사대로 몰린 덕분에 유인심사대가 훨씬 빠를 때가 제법 자주 있기도 했고 (개꿀). 그런 소소한 습관도,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여권을 맞이하기에 앞서 틈틈이 지나온 삶의 기록을 하나하나 정리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겠다. 기억의 궁전에 들어간다는 생각만으로 감회가 새롭다. 문고리에 사뿐히 내려앉은 먼지를 후 불어내고 잡아 돌린다. 저 안에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나와 여권의 이야기, 그 모든 시간을 함께 나누었던 당신들의 이야기. 설레는 한편 두렵기도 하다.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만큼이나 많은 슬픔과 상실이 스며들어 있기에.
멈칫하게 된다. 그냥 묻어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 한 켠의 속삭임. 심호흡이 필요하다. 멀리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그래도 꺼내봐야겠지. 지금껏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일, 삶의 새 챕터를 잘 쓰기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문이 열린다. 등 뒤에서 떠오른 햇살이 궁전의 열린 문 틈으로 파고든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딛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