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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Nov 14. 2021

콜로세움에서 오페라를 본다고?

문화유산, 보존을 넘어 공존으로

튀니지가 어디 붙어있는 나라지?


많은 한국인들에게 '튀니지'는 낯선 이름이다. 어디서 들어본 적은 있는데?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이슬람 문화권의 국가이면서도, 유럽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언어와 음식을 포함해 여러 분야에서 흡수한 프랑스의 영향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떤 면에서도 우리와 접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 미지의 국가를 우리는 아주 가끔씩 저녁 뉴스의 단신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상대로 A매치를 치른다는 소식에서 만날 수 있다. 지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북아프리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며, 그 중 어릴 적 배웠던 세계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카르타고'를 떠올릴 것이다.


카르타고? 로마제국 시대 그 카르타고? 그렇다. 먼 옛날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벌인 로마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패하여 사라진 해상제국. 자세한 역사를 잊은 사람이라도 알프스 산맥을 넘은 한니발과 코끼리 부대는 기억해낼 수 있으리라. 튀니지는 그 한니발의 모국 카르타고가 무너진 자리에 세워졌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정복한 뒤 패망한 제국의 자취를 지웠다. 파괴된 도시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거듭 뿌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구전 자체로 로마인들에게 깊이 새겨진 한니발과 카르타고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엿볼 수 있다. 그를 증명하듯, 수도 튀니스 동쪽에 위치한 '카르타지' (현지인들은 이렇게 발음한다) 유적지를 제외하면 현재 튀니지에 카르타고의 유산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대신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튀니지 곳곳에서 카르타고보다 로마 유적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규모나 보존 상태 등 여러 면에서 추천할 만한 로마 유적지로 튀니스에서 남서쪽으로 약 110km 가량 떨어진 '두가'를 꼽는다. 이 작은 고대 도시에는 원형 극장과 신전, 공중 목욕탕과 주거지 등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실상 이탈리아에서 볼 수 있는 로마 유적과 거의 동일하여 튀니지를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곳이지만, 아직은 다소 열악한 이 나라의 대중교통 인프라 덕분(?)에 이탈리아 로마에서처럼 사람들에 치이며 긴 줄을 설 필요 없이 호젓하게 돌아볼 수 있다.


그에 못지 않게 유명한 관광지로 '엘젬' 원형경기장을 들 수 있다. 엘젬은 튀니지 중부에 위치한 소도시로 튀니지 제2의 도시 스팍스와 지중해 관광으로 유명한 수스의 중간 즈음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 튀니스에서는 고속도로를 타고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도시 이름을 딴 이곳의 원형경기장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로마에 있는 원조 콜로세움보다 보존 상태가 좋다고 한다. 규모 면에서도 다른 지역의 로마유적을 압도하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원형경기장(Amphitheatre, 통상 모든 원형경기장을 콜로세움이라 부르지만 엄밀하게는 로마의 경기장만 콜로세움)으로 당당히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거대한 문화유산 역시 밀려드는 관광객의 홍수로부터 꽤나 자유로운 편이라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으며,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검투 장면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엘젬 원형경기장 외관 (左)  /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검투 장면 (右)


그러나 엘젬 원형경기장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데 있으니, 바로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오페라 공연이다.


엘젬 국제 심포니 음악 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musique symphonique d'El Jem)은 1985년부터 매년 여름 한 달 동안 진행된다. 엘젬 원형경기장 내부에서 열리는 제법 큰 규모의 국제 오페라 행사로 전 세계의 유명한 성악가와 오케스트라가 공연하며, 아시아에서 온 오페라 가수도 페스티벌에 간간이 참여한다. 내가 관람했던 해에는 한국인 테너도 명단에 있었는데, 동아시아인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그때까지만 해도 전 세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는 중국마트가 무려 '수도'인 튀니스에도 하나 없었다) 이 나라에서 한국인 성악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묘하면서도 반가운 기분이었다.


현지직원을 통해 페스티벌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오래된 문화유산에서 오페라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동시에 '그렇게 오래된 유적지에서 공연을 하고, 또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몇천 명의 사람들이 함께 그 공간을 사용해도 괜찮은 건가? 그게 가능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품은 채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진짜다! 심지어 벌써 30년 넘게 문제없이 진행된 행사였다. 이런 기회는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라. 티켓을 예약하고 공연을 기다렸다. 사실 나는 클래식이나 오페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공연을 직접 본 경험도 많지 않다. 그러나 이번 페스티벌은 달랐다. 고대 유적에서 열리는 오페라 공연이라니! 구글 검색 화면에 뜬 사진만으로도 들뜬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공연 당일, 벅차오르는 기대감에 엘젬까지 차를 타고 가는 3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엘젬은 정말 작은 도시였지만 1년에 한 번뿐인 큰 행사를 치르는 분위기만은 여느 유명 대도시 못지 않았다. 원형경기장 바로 앞 식당에서 양고기와 소고기 꼬치를 숯불에 구워 저녁을 든든히 해결하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내부에 입장하자마자 은은하고 이국적인 촛불로 꾸며놓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 덥지도 그렇다고 쌀쌀하지도 않은, 적당히 선선한 어느 여름날 밤, 2천 년 가까이 된 고대 건축물이 현대식 조명과 어우러져 뿜어내는 기운이 오롯이 느껴졌다.


공연은 환상적이었다. 아니, 황홀했다고 해야겠다. 아름다운 빛의 향연, 귓가를 감싸는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오페라 가수들의 목소리, 불어오는 바람 속에 배어 있는 냄새, 앉은 자리의 돌과 흙이 주는 감촉까지, 그야말로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과 촉각이 한데 어우러져 최고의 경험을 선사했다. 1시간 반이라는 공연 시간이 너무나도 짧게만 느껴졌다. 공연이 끝나고도 진한 여운이 가실 줄을 몰랐다. 밤늦은 시간이라 바로 튀니스로 돌아가야 했지만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급적 천천히, 그 모든 감각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오페라 직관. 황홀경이 따로 없다.


일반적인 콘서트홀이었다면 이 정도로 좋았을까?


공연을 보는 내내, 그리고 공연이 끝나고 튀니스에 돌아와서도 내내 생각했다. 최신 음향 시설과 안락한 의자, 쾌적한 냉난방 설비를 모두 갖춘 무대라 해도 이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 같다. 자연과 하나될 수 있는 탁 트인 야외 공연장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오랜 역사를 품은 유산 어느 한 자리에 앉아 현대식 공연을 관람하는 기분은 특별했다.


더욱 인상깊었던 점은 엘젬 원형경기장 바로 앞에 고기를 굽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는 것이다. 2천 살 먹은 거대한 문화유산을 마주한 채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지인 무리에 섞여 저녁을 먹으며 고대의 자취를 눈앞에 두는 일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우리로 치면 삼국시대 초기 고분 옆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상상해봄직하다. 내외부 경계를 완전히 막고 있는 담장이 없었기에 양고기를 굽는 노상 테이블과 원형경기장 간의 거리는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거대한 로마의 건축물이 마치 동네에 있는 흔한 건물인 것만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공존하고 있다는 기분,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 내가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강렬한 감흥에 휩싸였다.


심지어 가게들의 끝에는 이슬람 사원이 있었다. 현재까지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종을 울리고 코란을 외우며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제국의 유산, 이후 오랫동안 이 지역을 지배해 온 이슬람 문명의 종교 시설, 그리고 현대 튀니지인들의 삶이 배어나는 소박한 노상식당,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 존재한다. 그것도 카메라의 한 프레임에 온전히 담길 만큼 가깝게. 이 상상하기 힘든 생경한 풍경, 그러나 마치 태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어떤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와 현재의 자연스러운 공존


우리는 문화유산을 보존의 대상으로 여긴다. 국어사전은 보존을 '잘 보호하고 간수하여 남긴다'는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재를 지키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선조들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유산을 원형 그대로 보호하고 관리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계승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옛 전통과 생활 방식, 그 안에 배어 있는 삶의 가치와 지혜 등을 배우고 기억하기 위함이며, 나아가 현재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입는 옷과 먹는 음식,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습관과 가치관 등 우리 존재의 기원과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문화유산의 보존을 넘어, 문화유산과의 올바른 '공존'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문화유산을 보존한다는 명목 하에 엄격한 통제와 관리만 이루어진다면 문화유산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단절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하되, 연결되지 않은 채 각각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물론 조금 더 개방적인 보존 방법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선한 의지가 항상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기에, 문화유산을 원형 그대로 지키려는 노력은 분명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방식이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결국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을 아름답게 보호하면서도 조금 더 '열린' 공간으로 남아 있도록 할 수 있다면, 선조들의 자취가 지금보다는 가깝게 우리 삶에 배어들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와 현재의 진정한 대화는 그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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