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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무라면 Jun 12. 2019

원초적 냄새 속에서 피어나는 부부의 문학적 진보

연상연하 커플 부부 이야기


하는 수 없이 가방 깊숙한 곳에서

마치 고대로부터 봉인된

비장의 비서(秘書)를 꺼내듯 책을 펼쳤고,

비장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남편의 압력에 마지못해 글을 읽었는데,

그녀는 식당에서 그만…


* 고무라면의 우려먹기 3탄입니다. 지난 글 중에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글들을 골라 다시 퇴고하고, 매거진 주제에 맞게 각색해봅니다.

** 본 에세이는 필자가 난생처음으로 쓴 에세이, '화장실에 책 한 권을 두기로 했다'란 글의 개정판입니다. 처음이란 의미가 큰 (적어도 제겐) 사랑스러운 글이지만, 처참하게 묻혀있기에 '연상연하 부부'의 관점으재해석했습니다.

*** 최민석 작가의 에세이 단행본,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의 글 중, '원초적 냄새 속에서 피어나는 문학적 진보'라는 글의 제목을 차용했습니다.






   30년 동안 가장 많이 읽은 단 하나의 작품을 꼽자면 단연코 드래곤볼이다. 이 만화를 수도 없이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화장실’에서 봤기 때문. 드래곤볼은 항상 화장실 앞 책장에 비치되어 있었던 터라, 신호가 올 때쯤 아무 생각 없이 쓱 꺼내어 일을 보며 탐독했다.





   결혼 후 독립한 우리 집 화장실에, 아내의 동의를 구하고 처음으로 책 한 권을 들였다. 최민석 소설가의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라는 제목도 거창한 에세이 단행본이다. 사실 최 작가님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 군대 전역 후 다시 교회활동을 하고자 할 때 구역의 리더셨다. 이제 막 민간인이 된 나는, 세상을 향한 갈급함이 있었고, 마침 실존하는지도 의심스러운 소설가란 낯선 존재를 만났으니, 호기심이 몽클하게 솟아올랐다(심지어 난 문학도였던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점이 하나 있었다. 20대 초중반의 구역원들은 구역장이 소설가임에도 그의 소설을 읽고자 하는 의지뿐만 아니라, 작가에 대한 궁금증마저 없어 보였다. 어린이가 외계인을 마주한 것 같이 마냥 신기했던 나는 닥치는 대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일종의 의리였다). 능력자쿨한 여자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풍의 역사까지. 그리고 깨달아버렸다. 정상적인 독자들이 왜 그토록 그의 B급 작품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는가!



   수년의 시간이 흘러, 비로소 비운의 역작,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구했다. 출간된 지 2개월 만에 비극적으로 절판된 이 책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했는데, 마침 A 중고서점에 재고가 있어 잽싸게 낚아챘다. 마치 극비의 작전문서를 다루듯 두근대는 마음으로 인도 한가운데서 펼쳤던 첫 에세이, 원초적 냄새 속에서 피어나는 문학적 진보’.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


          눈물까지 찔끔하며, 낄낄거리고 


말았다. 책을 비밀리에 입수한 직후, 잠시 쇼핑을 즐기던 아내와 재회하고 점심 식사를 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며, 황망한 문학적 영감에 한껏 취한 나는 본의 아니게 소설가 최민석과 인간 최민석에 대한 경험적 열변을 토했다. 허나 어린 남편의 한심한 B급 취향이 못마땅했던지 살짝 뾰로통한 반응의 누님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가방 깊숙한 곳에서 마치 고대로부터 봉인된 비장의 비서(秘書)를 꺼내듯 낡은 책을 펼쳤고,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남편의 압력에 마지못해 글을 읽은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만…


          포복절도, 콧물까지 흘리며, 깔깔거리고


말았다.




   우리는 유쾌한 마음으로 수필집을 읽었다. 산뜻하게 스치는 글도, 특유의 병맛성 글도,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는 글도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은 부부의 문학적 소양을 위해, 다시 꼼꼼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비밀결사단체의 음모를 꾀하는 듯한 엄숙하고 진지한 가족회의 끝에 화장실 반입을 결정했다. 까탈스러운 누님의 마음까지 훔쳤던 원초적 냄새 속에서 피어나는 문학적 진보라는 글에서 최 작가님은 본인의 책이 변을 닦는 휴지 대용으로는 쓰이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갖지만,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한다. 그리고 가슴을 졸이며 작가로서의 다짐을 다시 세운다. (최 작가님, 저희 집에는 비데가 있으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여하튼, 우리 부부가 같은 작가에게 관심을 갖고, 같은 책을 읽으며 소소한 대화거리가 생겼으니 기쁠 따름이다. 더군다나 그 매개체가 문학이니, 표면적으로나마 고상하고 교양 있는 부부로 비칠 테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만족스러움에 취해있다. 문학을 즐긴다는 것은 다양한 관점을 엿보는 행위이고, 엉켜있는 사고를 정리하는 과정이며,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이다. 논리적, 감성적으로 감명받은 글에서 경험한 지적 카타르시스 및 짜릿한 공감은 덤. 비록 B급 장르에, 원초적 냄새가 풍기는 해우소일지라도, 문학의 가치는 훼손되지 않으리라. 




   오늘도 문학적 걸음을 내딛기 좋은 날이다. 그.곳.에.서. 아주 은밀하게.

   (누님 아내도 그 자리에서 즐겨 읽으신다)







* 절판된 비운의 역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는 2017년, 「꽈배기의 맛」이란 책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 '원초적 냄새 속에서 피어나는 문학적 진보'라는 글은 최민석 소설가님의 허락하에 전문을 올렸다.

https://brunch.co.kr/@rhanfkaus/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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