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지나야 보이는 진정한 ‘Career Path’
01.
올초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부서 소개를 한 적이 있다.
간단하게 부서 업무를 설명하고 Q&A 시간을 가졌는데 이런 질문이 가장 많았다.
“저는 경험도 없고, 관련 전공도 아닌데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
그들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너무도 잘 안다.
대부분의 사회초년생이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곤 전공, 인턴/알바, 자격증, 해외연수 경험 정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다운 일을 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도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그랬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호기롭게 박사학위를 따러 캐나다까지 갔건만, ‘연구의 길은 내 길이 아니다’며 석사학위만 겨우 받고 돌아와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근 7년간 academic에만 있다가 갑자기 business의 영역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 막막함이란!
구직사이트의 채용공고 스크롤을 한없이 내리며, 세상에 이렇게 많은 회사와 다양한 직업이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고민했던 날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렇게 애태우며 어렵게 컨설팅 인턴 기회를 얻었고, 그 작은 경험을 발판 삼아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올해. 나는 입사 10년 차가 되었다.
02.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경력이 ‘물경력’이라고 생각했다.
동년배의 친구들을 보면 다 자기 길을 찾아 ‘어떻게 더 잘할까’를 고민하는데, 나만 여전히 ‘이 길이 아닌데…’ 방황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처음 회사에 들어올 때 ’ 경영직군‘으로 지원해서 입사했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내 자리가 사라졌고 (원래 회사가 어려우면 간접부서부터 정리한다) 어쩔 수 없이 회사가 정해준 대로 조달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는 해외 사업을 주로 하는 건설사인데, 건설사의 조달업무란 건설에 필요한 자재/기계 등을 구매해서 현장까지 보내주는 일 전체를 말한다. 즉 연구실에서 물리만 공부하던 애가 갑자기 업체들을 만나 협상을 하고, 구매 계약서를 쓰고,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상상하던 일은 분명 아니었지만, 오랜 학업으로 다져진 엉덩이 근성으로 일단 최선을 다했다.
처음 2년간은 배우는 맛으로 열심히 했고, 그다음 3년은 열심히 하면 뭐가 보일까 싶어 열심히 했다.
그리고 다시 2년.
이제는 회사에서 나름 인정도 받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Next가 보이지 않았다.
나의 지난 7년간의 시간들은 무엇일까?
분명 열심히 했는데… 진급을 해야 하면 진급을 하고, 성과를 내야 하면 성과도 냈는데. 나는 여전히 나의 경력이 아무나 할 수 있는 물경력 같이 느껴졌다.
그때 나의 열심은 방향이 없었다.
03.
나는 줄곧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고민했는데, 질문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을 할지보다 앞으로 내가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인지 먼저 고민했어야 했다. 그것이 돈이든, 직위든, 지켜내고 싶은 가치이든 일단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은 무궁무진하다. 마치 정글짐처럼 말이다.
경력은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이다
사다리는 정상에 오르는 길이 하나뿐이지만
정글짐은 여럿이다.
- 셰릴 샌드버그 [Lean In] -
물론 커리어의 목표가 하루아침에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목표를 정할 때까지 오랜 시간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봐야 했다. 개인적으로 돈이나 직위 같은 것은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건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30년 뒤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30년 뒤에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해내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떤 선택을 해나가야 할까?
나는 두 가지 기준을 잡았다.
1.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 (혹은 가치로운가?)
2. 지속가능한 일인가?
이 기준에 따르면 나는 일도 일이지만 industry 자체를 바꿔야 했다. 그렇게 나는 부서 전배를 통해 Energy Transition 분야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부서 전배를 하고 1년 반.
여전히 나의 일은 회사의 니즈에 맞게 바뀌고 있지만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정글짐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방향만 맞다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길이 된다. 지금은 비록 아무 관련 없는 점들로 보일지라도 계속 지속하다 보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들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성실히 시간을 쌓으며,
자신만의 정글짐에 올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