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입시 1 > '입학사정관제'의 탈을 쓴 학벌 배급제
우리 국민들은 입시를 정말 모른다. 세계최강의 교육열을 자랑함에도 본인들의 자녀가 어떠한 매커니즘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더라. 원론적으로만 입시의 생리를 어림짐작할 뿐이다. 막상 자기 자식이 서울 시내의 대학교에 갈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알아볼 일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뭐, 부모 케어 없이 알아서 대학 가는 효자들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입시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 이 나라에 정말 없다. 지금부터 입학사정관제(이하 입사제)의 실체에 대해서 알려드리겠다.
입사제는 학생들이 자신만의 능력과 개성을 갖추어 대학에 입학지원을 하면, 대학이 그것을 사정(査定)하여 선발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 여기서 포인트는 ‘자신만의’이다. 이러한 입사제의 다른 이름은 자율이다. 즉, 자유를 최고의 기치로 하는 입시제도가 바로 입사제인 것이다. 국가에서 일선 학교의 수업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여 다양한 인재를 육성하고 그들이 자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올림피아드 입상이나 논문 게재, 행사 기획 등의 수많은 비교과를 포함할 수 있다. 가령, 최근 이슈된 나경원 대표 아들의 예일대 합격 스펙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테다. 그렇다. 요약하자면, 입사제는 학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을 그 극한까지 폭발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제도다.
입사제의 유래는 ‘유대인 억제’에 있었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대인들이 물밀 듯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유대인이라는 특정 인종이 명문대의 30% 정도를 차지하게 되면서 해당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입사제는 지금까지도 그러하듯, 지원자의 출신고교, 해당 지역의 특성, 인종, 부모의 직업과 학력, 가족사항 등에 대한 정보를 모두 기재토록 하고 있다. 출신자의 성분을 알아야만, 다양성을 제고(提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량적 학력도 고교 전체 석차나 SAT 성적을 통해 평가하고 있다. 이 일련의 시스템에는 자유의 나라 미국의 정신이 서려있다. 즉, 유대인으로 편중되며 그 발생이 우려되는 다양성 마비를 해소하기 위해서 평가항목을 위와 같이 속속들이 구성한 것이다.
이후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리 정리를 한 번 하고 가겠다. 미국의 입사제는 ‘다양성’을 주(主) 목적으로 삼아 추구한 것이지, 결코 ‘평등’을 그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다양성’은 ‘평등’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평등’은 피상적으로는 ‘다양성’과 닮았을지 모르겠지만, 그 본질은 오히려 ‘다양성 파괴’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공산국가가 산업을 꽃 피우지 못하고 절멸(絶滅)의 길을 걷게 된 것과 같은 메커니즘이라 생각하면 된다.
국제 스탠다드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이해는 이만하면 됐다. 그렇다면, 한국의 입사제의 실태는 어떠할까.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입학사정관제는 노무현 정부에서 그 도입이 고려되기 시작해, 이명박 정부에서 본격 시동(始動)되었다. 두 정부의 입학사정관제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갖는다. 실제 실시되었던 MB표 입학사정관제부터 살펴보자.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의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입학사정관제 도입’과 ‘마이스터고 도입’이다. 후자는 이후 취업편에서 심층 논의할 것이다. 전자는 다시 두 가지 키워드로 갈린다. ‘자율형 학교(=특목고, 자사고, 자공고 등) 확대’와 ‘대학의 자율선발권 부여’다. ‘자율형 학교’는 앞서 말했듯, 입학사정관제의 기치인 ‘자율’을 그 이름부터 내걸고 있다. 일선 학교의 교사를 신뢰하여 국가주도가 아닌 현장주도의 교육을 실현토록 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과학이나 예술, 어문의 스페셜리스트를 키우는 특목고나 다양한 활동을 기획-운영할 수 있는 자사고-자공고는 그야말로 입사제의 정상운영을 위한 필수요소였기 때문이다. ‘자율선발권 부여’ 역시 필수불가결했을 것이다. 일선 학교에서는 자율이 역동하는데, 대학이 국가가 주도하는 경직된 선발 시스템을 하명 받아 운영한다면 결국 그 자율성은 말짱도루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MB표 입학사정관제란 다양성과 자율성이 그 주(主) 목적이었다.
노무현표 입사제는 이와 철저히 달랐다. 필자가 비교를 위하여 하필 노무현 정부라 콕 찍었지만,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도 동일한 입사제를 운용했다. 해서 지금부터는 힘줘서 서술토록 하겠다. 지금부터의 내용은 현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니까. 노무현 정부의 입사제 도입 취지는 ‘비(非)명문고-흙수저도 명문대에 갈 수 있어야 한다.’였다. 즉, 노무현표 입사제의 목적은 ‘다양성’이 아니라, ‘평등’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입시에서 실현하고자 한 평등은 결코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이 제시한 평가잣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정량적으로 우수함으로 해당 학생의 우수함을 결코 담보할 수 없음은 필자도 동의함을 확실히 밝히겠다. 그렇지만 정량은 무모한 선발에 대한 과속방지턱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입학사정관제는 정성적 평가와 정량적 평가가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의 입사제는 ‘내신 평가’와 ‘수능 최저등급’으로 학생의 정량을 평가한다. 내신은 수치 그대로 반영하고, 수능은 ‘2개 과목 이상 2등급’ 등의 ‘PASS OR FAIL’ 형식으로 반영된다. 이때, 수능은 전국 단위에서 해당 학생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성 확보를 위한 지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이 객관성을 포기하려 들었다. 그들은 수능을 ‘절대평가’와 ‘절대 6등급제’로 고치려했기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은 반드시 ‘결과의 불평등에 대한 인정’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이 ‘결과의 불평등’의 발생 가능성을 막으려 들었음이 고려과정에서 덕지덕지 묻어난다. 각 급별 비율이 동일(EX.16%)하지는 않을 테지만 절대 6등급 아래에서 2등급은 대충 30% 정도의 지점은 될 것이다. 필자는 19년 수능에서 백분위가 그 반영비율마다 달랐지만, 9등급 상대평가 제도(누적비율 1등급 4%, 2등급 11%) 아래에서 전과목 백분위가 0.8%~1.2% 정도를 마크했다. 해당 성적으로는 연대 어문계열이나 서성한 상경계열 정도가 지원이 가능했다. 다시 말하지만, ‘전과목’이다. 아래의 성적표처럼 받아도 정시에서는 정량적으로 간신히 SKY에 정량적으로 만족되는 성적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최초 도입 취지대로라면, 수능 성적표 전체에서 딱 두세 과목 정도만 30% 안에 든다면, 서울대도 정량적으로 만족시키는 성적이 되었다는 말이지 않은가.
물론, 절대평가는 그 난도에 따라서 상대성이 무너질 수도 있다. 1등급이 1%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능이란 시험이 어디 그딴 식으로 출제가 가능한 시험인가. 절대평가를 할지언정, 상대평가의 등급 비율과 비슷하게 낼 수밖에 없는 시험이다. 오히려, 그들이 비범한 시도를 했더라도, 1등급 1%가 아니라, 1등급 30%를 시도했을 것이다.
근거가 뭐냐고? 그들은 입사제를 정시의 반의어로 사용했고, 정시란 곧 대치동에서 이루어지는 계급 상속의 수단이라 보았지 않은가. 즉, 그들은 ‘수능’이란 제도를 기득권의 보호막으로 보았고, 그것을 적폐로 몰아 그 청산수단으로서 입사제를 도입했던 것이다. 최저등급제도 아래에서 뭐가 더 무력한 모습인가? 1등급 1%? 1등급 30%? 당연히 후자다. 그들에게 정량적 요소란 결과의 평등을 향한 길에 등장한 과속방지턱이었을 테다. 그렇다. 그들은 그것을 없애 평등행 고속도로를 뚫고자 한 것이다.
평등을 향한 교육폭동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폭거가 발생한다. ‘수능' 무력화를 '수시-정시 비율 7:3'으로 달성한 진보교육계는 정성평가에도 폭격을 개시했다. ‘교외 활동 기재 금지’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에 굴복했다.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적극 동조했다. 왜? 표가 되니까. 자기 자식이 교외 활동에서 무력한 부모들에게 이처럼 달콤한 이야기가 없었을 테니까. ‘너희 아들이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라, 제도가 이상했던 거야.’, 이 얼마나 표 되는 소리인가. 즉, 이에 따라 한국의 입사제는 교외 활동이라는 자율성을 잃었다. 우리 학생들의 자율성은 이렇게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버리고야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입사제의 관건은 어디에 위치하게 되겠는가. 바로, "어느 학교가 ‘교내 활동’을 짱짱하게 밀어주는가"가 관건이 되지 않겠는가.
작년 교육부가 공포한 ‘특목고 폐지’가 바로 이런 흐름의 결과인 것이다. ‘교내 활동’이 짱짱한 특목고를 무너뜨려야만 모두가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으니까.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다. 진보 교육계는 한국 교육에 평등 업로드를 완료했다. 이제 한국의 학생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학교 안에서의 지정된 학습’만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양성은 그 어디에도 발 디딜 틈이 없게 된 것이다. 한국의 학생들은 평등을 위해 다양할 기회를 빼앗겼다. 다양성이 상실된 입학사정관제, 그것은 가짜다.
교육에 관심이 없으셨던 분들은 이상의 설명으로 부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사회의 다른 부작용에 빗대어 다시 한 번 설명해드리겠다. 먼저, 다양성과 자율성을 상실한 입사제는 부동산 정책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테다. 재건축과 재개발을 막는 등의 공급을 차단하는 모습은 ‘교외 활동 금지’와 ‘특목고 폐지’로 상징되는 정성적 평가의 부실화와 유사한 모습일 것이다. 이미 있는 부동산으로만 거래가 이루어지게 하고 정부가 공급하는 임대주택만에 의존해야하는 서울시민들의 절망적 입장, 그것이 바로 한국 학생들의 입장이다. 여기서 논의를 한 단계만 더 꺾어 진전시키자면, 우리나라 일반고는 평준화되었다. 즉, 학생들의 학교를 선택할 자율권은 자신의 주소지 인근으로 국한된다. 그렇다면, 결국 학생의 교육권은 무엇에 따라 결정될까. 부모의 재산이다. 기회의 평등? 오늘도 삶은 소대가리의 입꼬리는 쉴 틈이 없다.
다음으로, 흙수저 학생들도 비(非)명문고임 학생들도 부박한 정량에도 불구하고 명문대에 가야 우리 사회가 발전할 거라는 그들의 주장, 경제면에서도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들이 떠들어재끼던 '소득주도성장’과 그 맥락이 똑같다. 일해서 돈을 주기도 하지만, 돈을 주니까 일하기도 한다는 그들의 주장. 너무도 닮았다. 공부해서 명문대를 가기도 하지만, 명문대에 갔기에 공부하기도 한다는. 필자는 희망에 익사할 것 같다. 쓰나미 치는 위시풀 띵킹에 숨쉴 틈이 없다. 모두가 알 듯, 소득주도성장은 철저히 실패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할 정도로, 장기투자종목이다. 그래서 아직은 현상적 지표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이 씁쓸한 촉은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거의 모든 잣대가 무력화되고 남은 잣대는 딸랑 ‘내신’과 ‘교내 활동이 기록되는 학생기록부’뿐이다. 무엇인가 악취가 올라오지 않는가. 이 누더기된 입시제도가 주도하는 교육에서 헤게모니를 주도하는 슈퍼 갑(甲)은 누구겠는가. 바로, ‘교사’다. 이제 ‘교사’는 마음만 먹으면 학생의 미래를 짓밟을 수 있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최근 검경 수사권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기소는 검찰이 하고 판결은 판사가 하지만, 경찰이 수사를 뭉개버리면 둘의 역할은 무용지물인 것이 되었다. 교사는 이 수사종결권을 쥐게 된 경찰만큼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 것이다. 입학지원은 학생이 하고 입학허가는 대학이 하지만, 교사가 생활기록부로 학생의 학습을 평가절하 해버리면 학생의 입시는 파투가 나버린다. 즉, 교사는 입시종결권을 쥐게 된 것이다.
필자는 묻고 싶다. 교육이 왜 평등해야 하는가. 야간자율학습을 폐지하고, 수학 과목에서 벡터와 공간도형을 들어내가면서 공부하지 않을 자유는 그토록 보장하면서, 원없이 공부할 자유는 왜 보장하지 않는 것인가. 당신들이 원하는 사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올림피아드 수상자가 그리고 과학캠프 수료자가 대학에서 각광받지 못하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인가. 그렇게 비(非)명문고 학생이 명문대에 우수수 입학하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인가. 왜 아직도 교육판 소득주도성장에서 탈출하지를 못하는가.
필자는 입학사정관제에 적극 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딴 가짜 입학사정관제에는 찬성할 수 없다. 교육이 결코 수능을 위한 계층 사다리로만 역할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따위 계층초월일변도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도 안 된다. 교육은 그 자체로 교육이어야 한다. 입시는 교육의 연속성을 제고하기 위한 '교육 자유'라는 이름의 다리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