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가리봉동 87번지>
연극은 <가리봉동 87번지>는 한겨울 추운 아침으로 시작된다. 동네슈퍼와 마주하는 열쇠집이 무대배경이다. 아침을 제일 먼저 깨우는 사람은 열쇠집 탈북민 영감 리원일과 슈퍼 여주인 윤필순이다. 이들은 물리적 거리만큼 가까운 이심전심 통하는 이웃이다.
지난 16일부터 20일까지 대학로 열린극장에서 공연한 이 연극에서 '가리봉동 87번지'는 슈퍼가 자리한 행정동 주소를 뜻한다. 이방인들이 많이 모이는 사랑방 같은 공간을 상징한다. 슈퍼를 드나드는 사람 중에는 탈북민을 포함해 조선족, 베트남 사람도 있다.
동시에 이들은 정착을 넘어 '코리안 드림'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곳의 삶은 녹록지 않다. 탈북민들은 어렵게 북한에서 탈출해 한국에 왔지만 남한에서 취업하며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이방인들 모이는 사랑방
남한 사람들이 탈북민에 대한 일부 삐딱한 시선도 여전하다. 연극에서는 "탈북민들이 도움만 받는 사람들"이라며 불만을 터뜨리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슈퍼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주정뱅이 임주상은 탈북민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탈북민 중에는 자신을 '조선족'이라 소개하는 사람들이 있다. 탈북민보다 조선족이라 해야 취업이 용이하고 대접이 낫기 때문이다. 연극 속 탈북민 리진철, 리금영 부녀가 그런 경우다. 16살 딸을 데리고 온 진철은 한국에 오자마자 조선족으로 가장해 취업했다.
부녀는 가리봉동에 이사 오고 슈퍼에 들르면서 사랑방 가족으로 합류하는데 열쇠집 주인 리원일 영감과도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탈북민은 탈북민을 알아본다고, 부녀는 탈북민이라는 것이 들통난다.
연극 속 이방인들은 슈퍼에 모여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을 솔직히 보여준다. 이들은 서로를 통해 위로를 얻고 공감한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민자인 부이티안은 '돌싱'으로 탈북민들의 갈등과 방황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슈퍼 주인 윤필순은 장사하는 사람을 넘어 이방인의 애환을 보듬는 이로 부각된다. 필순은 한 달에 한 번 자리를 만들어 이들에게 간식을 내주고 반찬도 나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열쇠집 영감도 탈북민이다. 리 영감은 아들이 7살 때 탈북해 전전하다 가리봉동에 정착했다. 16살 딸과 함께 북에서 탈출한 45세 리철진이 리 영감의 자식이라는 건 이북고향에서 먹던 옥수수로 만든 '퐁퐁이떡'과 '장마당'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면서 밝혀진다.
손녀 리금영은 북에서 남한은 거지들만 사는 곳이라 배웠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혼란을 겪는다. 그러면서 남한을 두고 '새엄마 같다'고 표현한다.
연극 속 리 영감은 자신이 탈북할 때 가져온 열쇠로 의문의 나무상자를 직접 연다. 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찍은 가족사진이 들어있었다. 헤어진 가족들은 그렇게 재회한다. 연극은 공연 내내 탈북민들을 포함한 이방인으로 사는 다문화가족들을 통해 '코리안드림'을 응원한다.
다만 연극의 부제는 '이상하고 수상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쉽다. 이방인을 남한 주민 시각으로 본 것 같기 때문이다.
연극은 2024년 남북통합문화 콘텐츠 창작지원 선정작이다.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는 매년 창작연극을 지원하고 있다. 연극에서 16살 딸 아버지 리진철 역을 맡은 김필주는 실제 탈북민 출신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