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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브런 Dec 16. 2024

구순 선배들 '장수연'에 다녀왔습니다

함께 하는 든든한 학교선후배들 덕분에  결코 외롭지 않다

▲남산전망대



요즈음 들리는 이야기는 온통 우울한 것들뿐이고 애써 피하고 싶을 정도다. 계엄 사태가 불러온 어수선한 혼란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자주 연락하거나 안부를 묻던 친구들과 지인들도 숨죽이며 이 해가 그저 조용히 마무리 되길 바라는 분위기다.



그런데 한 후배가 행사초대를 보냈다. 취미로 모인 고등학교 등산모임에서 세 분의 원로 선배(내게는 13년 차 선배, 나이는 20세 이상) 백수연을 오는 주말에 남산 아래 모처에 마련했는데 함께 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나는 흔쾌히 응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산뜻한 제안이 있을까 싶었다. 정말 고마웠다. 거두절미하고 가겠다고 했다. 이 삭막한 세상에 만수무강 잔치라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가장 멋진 추억으로 기억될 것 같다.



후배들이 선배들에 대한 존경을 담아 뜻있는 자리를 만들다니 기특한 생각이 들면서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한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어느 핸가 선후배들이 모인 자리에서 애교심을 빗대 '호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말에 무릎을 친 이유이다.



연회장으로 가기 전에 운동을 겸해 남산 둘레길을 잠시 걸었다. 주말인데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생경한 느낌이다. 여기저기 일본인 등 외국인들이 서울 남산 풍광을 즐기고 있었지만 썰렁해 보였다.



▲남산소나무숲의 소나무들이 폭설에 쓰러져있다



남산에 오르면 전망대와 팔각정까지 가는 것이 의례적인 코스지만 이번에는 둘레길에서 벗어나 '소나무숲 탐방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이 코스는 '한양도성순례길'과도 연결되는데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숲에는 많은 소나무들이 꺾이고 잘려 있었다. 지난달 폭설 때 쌓인 눈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거나 쓰러진 것들로 보였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적어도 50~60년이 넘는데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관목들이 특히 피해를 많이 입은 것 같았다.



▲남산소나무숲의 소나무가 폭설로 부러져있다



정말 허망하고 안타까웠다. 이곳을 관리하는 기관이 등산객들이 이를 보고 실망할까 서둘러 벌목하거나 정리한 흔적이 여러 곳에 있었다. 소나무숲의 어이없는 광경은 마치 암울한 시국이 연상돼 서둘러 숲길을 빠져나왔다.



선배들의 장수를 축원하는 오찬장을 찾았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모두 90세를 넘긴 분들이다. 등산으로 다져진 몸과 마음이 하나같이 건강해 보였다. 현장에는 선배 얼굴을 보러 30여 명의 후배들이 자리했다.



우리 후배들은 돌아가며 선배들에게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술을 따라 드렸다. 40~50대 후배들은 부모님을 떠올리며 큰절을 올렸다. 여느 장수연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구순이 넘은 학교선배 세 분이 장수연에 초대받았다



후배들이 만들어준 성찬의 장수 무대에서 세 사람은 감격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선배들은 "가족 이상으로 함께 하는 삶의 존재와 의미를 늘 되새겨준 후배들에게 감사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어 선배들은 "여기까지 온 것이 후배들 덕이라며 앞으로도 건강할 때까지 후배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



초고령사회 이면에는 관계 단절과 고립이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선배들의 소박한 염원이야말로 가장 값진 소망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살면 나이 듦이 결코 외롭거나 소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기 때문이다.



이제 70세를 갓 넘긴 우리 또한 선배님들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배들은 후배에게 덕담을 건네고 후배들은 선배를 아끼는 지극히 따뜻한 세상에 살고 싶은 것이다.



귀갓길이 그렇게 가볍고 기분 좋을 수 없었다. 어딘가 허전한 마음을 채운 것 같은 감흥이다. 시끄러운 시국에서도 사랑과 우애를 나눌 수 있는 든든한 선후배들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살아갈 용기와 한가닥 희망도 얻었다. 내년에도 구순 선배님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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