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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치열했던 설날 세뱃돈 추억

새로운 희망과 용기 얻는 설날 되기를

by 이브런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를 맞는 인사와 덕담이 바삐 오간다. 이런 분위기는 1월 한 달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새해에 대한 설렘보다 걱정이 앞선다. 주변 사람도 대부분 볼멘소리뿐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경제난과 고단한 삶 탓이리라. 그래도 늦지 않았다. 다가오는 설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부터 설날을 통해 조상에 감사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말 그대로 설날이 새해 첫날이었다. 오늘날 설날의 의미가 많이 퇴색됐지만 설날은 어릴 때 가장 손꼽아 기다린 날이었다. ‘설빔’을 입을 수 있고 푸짐한 설음식도 있었다. 설날의 밝은 표정과 추억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내 기억에 설날 즈음 제일 바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설날에 대비해 오래전부터 고기나 생선 등 제수물품을 준비했다. 미리 방앗간에서 만든 긴 가래떡을 잘게 썰고 만두를 빚고 그 많은 전(煎)을 혼자 감당했다. 철없던 나는 몸과 맘이 분주한 어르신들을 보고서야 명절이 임박한 것을 눈치챘다.


이북 개성 근처가 고향인 아버지는 설 차례상에 엄마가 만든 ‘개성음식’을 정성껏 올렸다. 아버지는 엄마가 설마다 내놓는 눈사람 모양의 ‘조랭이 떡국’이 다른 집보다 맛있다고 늘 말했다. 생강과 계피에 우려낸 물에 곶감을 띄운 시원한 수정과와 꿀로 만든 강정과 약과의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설날 차례를 마치면 또 다른 행사가 기다린다. 아버지 따라 고향 친지와 어르신 댁을 방문해 새해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여러 곳을 순회하다 보면 긴 하루가 다 갔다. 명절 때면 아버지는 손윗 친지들께 깍듯이 대했다. 나에게도 빠짐없이 인사하도록 가르쳤다.


그때 어르신들이 내게 한 덕담은 대개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덕담대로 비록 공부하지는 못해도 아버지 닮아 ‘경우 밝다’는 칭찬을 들을 때 가장 흐뭇했다. 아무튼 아버지 덕분에 어르신께 철저히 인사하는 법 하나는 제대로 배웠다.


설날 풍경 중 하나는 어른들의 화투패가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은 으레 화투패를 돌렸다. 그때는 화투가 어른들의 대중오락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어깨너머 화투를 처음 본 것도 그때쯤이다. 어른들과 달리 우리들은 작은 방에서 편을 나눠 ‘윷놀이’를 했다.


윷놀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우리들이 즐기는 단체놀이이었다. 약간의 판돈이 걸려 있는 만큼 왁자지껄하고 응원이 치열했다. 승패에 따라 판돈의 향방이 정해질 때 지는 쪽은 분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를 지켜본 어르신들이 ‘개평’을 얼마간 챙겨주셨다. 윷놀이 때문에 아이들 간 사이가 멀어질까 짜낸 현명한 지혜였다.


무엇보다 설날이 즐거운 날로 기억되는 것은 세뱃돈이다. 용돈이 따로 없던 시절 우리들이 두둑한 용돈을 만질 수 있는 날은 설날이었다. ‘설대목’인 셈이다. 어림잡아 세배드릴 어른은 20명이 넘었다. 사실 마음은 콩밭에 가 세배보다 세뱃돈에 있었다. 설날 이곳저곳 부모님 따라 친척집을 전전하면서도 지치지 않은 것은 세뱃돈 욕심 때문이었다.


행운을 부르는 세뱃돈을 받기 위해 ‘묵은세배‘를 동원하기도 했다. 묵은세배는 설날 그믐날 하는 세배다. 친척 세배는 설날 부모님에게 먼저 세배드린 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다른 애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세뱃돈을 타기 위해 소위 잔머리를 쓴 것이다. 오늘의 기준에서 보면 기가 차지만 묵은세배를 받지 않는 집안이 더러 있어 나중에 섣부른 행동이 들통나 부모님으로부터 혼나기도 했다.


세뱃돈에 눈이 먼 우리들이 설날 ‘대박’을 놓칠 리 없었다. 나는 친척 아이들과 몇 해를 함께 몰려다니면서 어느 집 누가 더 많이 세뱃돈을 주는지 알았다. 우리 딴에 소위 ‘물 좋은’ 어르신이 누군지도 공유했다. 우리들은 서로 세뱃돈을 세어가며 자랑하기도 했다.


설날 세뱃돈은 ‘큰돈’이었다. 문제는 세뱃돈이 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엄마에게 고스란히 바쳐야 했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면 손쉽게 쓰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며 몽땅 압수했다. 나는 순진하게 빼앗기고 그럴듯한 용돈을 손에 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뱃돈 수탈(?)은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고야 비로소 끝났다.


나중에 세뱃돈은 돌고 도는 ‘품앗이’라는 것도 알았다. 엄마가 우리 집에 오는 친척 애들의 세뱃돈을 무엇으로 충당했겠는가. 우리 집에서 나간 세뱃돈도 상당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받은 세뱃돈 일부를 떼어 주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세뱃돈 매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성인이 되고서 자연히 세뱃돈을 받는 경우는 뜸해졌다. 대신 커 가는 조카들에게 세뱃돈 주는 게 새로운 낙이었다. 이제는 세뱃돈을 주기보다는 받는 나이가 되고 말았지만 세뱃돈을 건네는 미덕만은 지키고 싶다. 세뱃돈이 건네는 덕담 중 가장 ‘강력한’ 덕담이라 하지 않는가.

50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는 우리 설날마다 흩어진 가족들이 모두 모여 음식을 함께 먹고 세뱃돈을 건네는 풍습을 계속 지켜오는데 자녀는 물론 손자들까지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손자들은 설 명절을 자랑해 학교에서 주목받았다고 전했다. 이를 보니 외국 나가면 우리 고향과 전통을 절로 사랑한다는 말이 새삼 이해된다.

쉽지 않겠지만 힘든 삶에 위안과 평온을 얻는 설날이 됐으면 좋겠다. 설날의 참뜻은 가족끼리 오랜만에 만나 따뜻한 떡국을 함께 먹으며 덕담과 소원을 주고받는 것이다. 새 희망과 기대를 품을 수 있는 설날과 가족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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