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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족여행 다녀왔습니다

가족 응원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

by 이브런

지난해는 여러모로 힘겨웠다. 연초부터 입원을 반복하며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한 해 꼬박 병세와 씨름하며 보냈다.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할 없는 불안이 자꾸만 옥죄고 있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이 예전처럼 활기차지 않고 심란하던 차였다.


지난 세밑 1박 2일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허구한 날 병원만 맴도는 나를 위로하겠다고 아내가 작심하고 마련한 자리다. 흩어져 살기 바쁜 애들까지 동원했다.


몸이 고달프면 집 밖을 선뜻 나서기 번거롭고 귀찮은 법, 여행 제안에 처음에는 내키지 않은 마음을 속절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하지만 내 입장만 내세우고 고집 피우는 것도 예의가 아니어서 결국 수락했다.


가족여행은 애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제외하고 다닌 기억이 없다. 그새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오래전에 내 곁을 떠난 애들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보고도 싶었다.


행선지 결정은 내게 주어졌다. 고심 끝에 남해안 여수로 정했다. 영하 10도가 넘는 추운 서울을 벗어나 따뜻한 남쪽을 찾아가고 싶었다. 내 생각은 다른 사람도 비슷해 가족여행지는 만장일치로 여수가 결정됐다. 여수는 여수세계박람회 때 가본 적이 있다.


목적지를 정하자 각자 분담해 여행을 준비했다. 아내는 KTX 열차를 일찍이 예매하고, 작은 애는 숙소와 렌터카를 수배하고, 큰 애는 현지 일정과 식사메뉴를 짰다.


이후 여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나도 모르게 여행을 앞두고 기다리는 마음이 들떴다. 여행 첫날 아침 7시 5분 서울역을 출발, 3시간 만에 도착한 여수에 발을 딛는 순간 온화한 바닷바람이 코를 스쳤다.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역시 여수는 미항답게 가는 곳마다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 거북선은 늠름해 보였다. 동백나무로 빼곡한 오동도 산책길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여객선은 여수 앞바다 대경도에 미끄러지듯 도착했다. 해상케이블카에서 한려수도 바다를 직관하며 듣게 되는 ‘여수밤바다’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여러 유명한 음식들도 입맛을 돋우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새로 생긴 조그만 카페들은 저마다 커피 향을 자랑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눈부신 바다낙조를 바라보는 낭만은 지금도 꿈만 같다. 10년 전 여수세계박람회 때보다 여수는 더 깨끗하고 정비된 모습이었다.


이뿐 아니다. 아내와 함께 앉은 열차 좌석은 푸근하고, 자리 건너 옆에서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두 아들도 정답게 보였다. 이런 추억이야 말로 우리가 원하던 잔잔한 행복이었다.


숙소에서도 모처럼 흉금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누구도 연출하지 못한 진솔한 가족회의였다. 가족끼리도 서로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애들은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애들에게 바쁜 시간을 어떻게 쪼개 냈는지 굳이 묻지 않았지만 녀석들은 왜 괜한 걱정을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애들은 내 건강을 염려하며 예전의 내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고 했다. 이어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마” “힘들어도 우리가 있잖아” 등 응원하는 말에 울컥하기도 했다.


애들의 깊은 속마음에 나는 어린애처럼 흥분하며 평소보다 이야기를 많이 했다. 뭣보다 나는 가족여행을 함께 해 기쁘다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기회가 닿는 대로 가족여행을 자주 하자고도 했다.

이번 여행은 내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됐다. 여행을 통해 삶의 새로운 의지를 얻고 덕분에 내가 버틸 힘이 생긴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쓸데없는 근심이 사라진 듯 몸이 왠지 가볍다. 부끄럽지만 가족여행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가족여행에서 특히 애들이 수고가 많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들 손에 이끌려 보살핌을 받는 여행은 생각지도 못했다. 애들한테 배우고 느낀 것도 적지 않았다.


누군가 여행할 때보다 떠나기 전 계획을 세우고 준비할 때 더 설레고 재밌다고 하는데 이번 여행은 두 가지 모두 완벽하고 맘에 들었다. 아내와 나는 애들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만 다녀 ‘힐링여행’ 그 자체였다.


이번 가족여행은 순전히 나를 위해 추진됐기 때문에 특별했다. 아내와 애들에게 따로 고맙다는 말은 못 했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이참에 새해 가족의 소망을 빌었다. 애들에게 도전하는 기회마다 행운이 따랐으면 좋겠다. 늘 곁에서 돌봐주는 아내도 건강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는 더 이상 슬퍼하거나 자책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여수를 오가는 48시간 여정은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나는 병마를 이겨내고 새로운 가족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여수에서의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 준 가족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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