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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브런 Oct 05. 2023

폐지 줍는 영어강사님

서울 금천구 최고령 영어강사가 폐지 줍는 사연

몇 달 전 동네 남문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을 때다. 아내가 “저기 영어 선생님 같은데”라며 백발의 노인을 가리켰다. 잠시 내 눈을 의심했지만 내게 영어를 가르친 선생님이 시장 점포에서 나오는 폐지를 줍고 있었다. 

  

영어 선생님은 서울 금천구 독산3동 주민센터에서 주민들에게 영어회화를 무료로 강의하는 김종수(87) 어르신이다. 최고령 영어강사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선생과의 인연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나는 그의 수업을 받았다. 그가 구사하는 영어회화는 수십 년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하며 갈고닦은 실력이라 수강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영어 실력만큼 빛난 것은 수강생 눈높이에 맞춰 가르치는 선생의 섬세한 인간미였다. 영어 수업이지만 주민들 간 서로를 배려하고 친교하는 시간이었다. 


선생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겸손함과 무엇이든 베푸는 후덤함에 중도에 포기하거나 탈락하는 수강생은 거의 없었다. 매년 스승의 날에는 수강생들이 조촐한 자리를 만들어 선생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이러다보니 오래된 수강생 중에는 선생님을 부모님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분도 있다. 나 또한 인품에 매료돼 인생에서 참스승 한 분을 또 모시고 있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영원한 스승으로 각인된 분이 시장에서 폐지를 줍다니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시장에서 선생님이 민망해할까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 따로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 

     

폐지 줍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지만 어떤 연유가 있는지 궁금했다. 이후 그가 폐지를 줍는 장면은 자주 목격됐다. 더운 여름밤, 잠옷 바람으로 폐지를 줍는 모습도 봤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수집한 폐지를 집까지 갖다 드린 적도 있다. 

     

며칠 전에는 정장 차림의 선생님이 길 건너 인도에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폐지를 고르고 있었다. 희한하다싶어 선생님을 거들고 싶었지만 그냥 발길을 돌렸다. 

    

그냥 지나친 것이 마음에 남아 집에 와서도 선생님이 자꾸 떠올랐다. 영어강사를 하면서 저렇게 폐지까지 줍는 게 온당한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얼마 전 선생님께 점심을 대접했다. 내심 폐지 수집을 만류하려고 마련한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은 완강했다. 자기집에 세 들어 사는 폐지 줍는 분을 돕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한편 선생님은 오랜만에 카톡으로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올초부터 눈에 갑자기 발병한 통증 때문에 동네 안과와 유명하다는 대학병원을 포함해 십여 곳을 다니며 온갖 검사를 했지만 병명을 알 수 없어 치료를 거의 포기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통증이 심해 책을 볼 수 없고 카톡마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늘 위로의 글과 격려를 아끼지 않던 선생님이 자신의 안타까운 사정에 기도를 요청하다니 나로선 빠른 쾌유를 기원할 뿐이었다.  

    

사실 선생님이 백방으로 눈을 고쳐보겠다는 것은 영어를 배우는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도가 없자 선생이 오래도록 진행한 영어강좌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는 후문이다. 


제자들은 선생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그의 영어강의를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선생님이 동네에서 폐지 줍는 장면은 이제 일상이 되다시피 됐다. 폐지를 보면 지나치는 법이 없다. 영어강의를 못하는 대신 폐지 수집 봉사로 본격 나선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 집을 가면 문 앞에 폐지가 쌓여 있다. 선생이 주운 신문이나 폐지도 상당하다. 사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다 하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선생님을 알고 있는 내 아내도 “폐지수집은 아닌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고집(?)을 존중하기로 했다. 평소 선한 가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모토를 얼마간 수긍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참에 폐지를 수집하는 행위에 대한 편견도 버리기로 했다. 


세상에서 남을 위해 뜻있는 일을 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폐지 봉사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선생의 폐지에는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담겨 있다.  

    

선생님을 지켜보면서 이웃사랑과 봉사를 말로만 외치고 떠들고 다닌 내가 솔직히 부끄럽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눈병이 하루빨리 쾌유하길 빌어본다. 오늘따라 선생님과의 인연과 추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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