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눈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과 작품들을 위주로 다루며 관련한 경험이나 지식들을 덧붙여 보려고 합니다. 열심히 박차를 가해서 연재해보겠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호탕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이 위인은 그를 가장 잘 따라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상이 있을정도로 누구에게나 친숙한 인물일 것이다. 혹여 이 위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등은 익히 귓 속에서 맴돌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태생인 그는 항상 인간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이라는 족속의 모든 성질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그의 작품 속에 녹여내고 있다. 존엄성과 끈기, 나약함과 나태함, 고독과 권태, 사랑과 우정 등 그에 의해 아름다운 작품의 한 축으로 탄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노인과 바다>에서는 인간이 갖는 존엄성을 우리 모두에게 선사한다. 산티아고 노인의 집념과 끈기는 우리 족속이 가진 이 세상 어떠한 것보다 빛나는 성질이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파멸당할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다.' 산티아고의 몸을 빌린 헤밍웨이가 바라본 우리의 존엄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빗속의 고양이>에서는 빗속에 홀로 거리를 배회하는 고양이에 대한 연민과 그를 바라보는 노인의 고독과 외로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이번에는 인간의 경독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내어 놓는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나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는 꽤 친한 사이였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킬리만자로의 눈>이 스콧을 향한 것이라는 것에는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헤밍웨이가 그의 <위대한 개츠비>를 접했을 때 겪었던 격동의 감정과 감동은 괴팍한 성격의 스콧 작가로서 우러러보는 계기가 되었다. 헤밍웨이는 그의 에세이 <피츠제럴드와 함께 떠난 리옹 여행>에서 '그 책(위대한 개츠비)를 다 읽고 난 나는 스콧이 무슨 짓을 하든, 그리고 그가 어떻게 처신하든 그것은 일종의 질병과 같은 것이니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를 도와주고 그의 좋은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라고 일종의 선언을 한다. 그렇게나 변덕스러웠던 스콧의 기질을 완벽한 걸작 하나로 잊게 만들만큼 그의 작품은 대단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스콧의 기질덕인지 그의 걸작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했고, 헤밍웨이는 이를 안타까워하고 비판하며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그의 나태함을 여과없이 드러내어 스콧과 사이를 멀리하게 된다.
#킬리만자로의 눈
<킬리만자로의 눈>은 나태함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삶과 죽음에 대한 큰 경계에서 거대한 고찰을 형성하고 있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가 혹은 삶을 지속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헤아릴 것일까. 이런 생사에 대한 고찰들 속에서도 우리에게 나태한 족속의 성질을 은연중에 제시하는 그의 날카로움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리와 그의 부인은 킬리만자로의 정상 근처의 야전침대에서 헬기를 기다리고 있다. 해리는 다리에 생긴 큰 상처가 괴저를 일으켜 점점 죽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해리는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과 삶의 사이에서 그동안 자신의 곁에 있었던 많은 일들과 자신이 유능한 작가이던 시절, 점점 나태해져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되었던 순간들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그가 여행했던 파리, 터키, 등 여러 나라들에서 영감을 얻은 아이디어들은 향락과 유흥(물론 일말의 사랑도 있었다.)으로 잊혀져 갔음을 실감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스콧에게 간접적 혹은 직접적으로 그의 병중(정확히는 그녀의 아내 젤다)과 상태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귀중한 작품이 될 많은 것들을 낭비했다는 느긋하거나 게으른 과거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정적으로 헤밍웨이는 작중에 줄리언(스콧)의 작품까지 인용하면서 그의 탐욕스러움과 권위욕을 드러내어 절정의 반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돈 많은 사람들은 대개 재미가 없는 데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거나 주사위 노름만 지나치게 할 뿐이다. 그들은 단조롭고 반복적이어서 지루하다. 그는 가련한 줄리언(스콧)이 생각났다. -(중략)-
"아주 돈이 많은 부자들은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다"라는 소설(스콧의 소설 <부잣집 아이>의 앞부분)을 쓴 적이 있었다.' -(중략)- 부자란 특수한 매력을 지닌 족속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다른 어떤 것 못지 않게 그 때문에 망가졌던 것이다.
그(해리)는 망가진 사람들을 경멸했다.
-<킬리만자로의 눈> 中-
스콧의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한 작가는 망가져있었다고 헤밍웨이는 확신했고, 해리의 망가진 모습에 더해 그를 한 번 더 불러들여 작심하고 경멸을 서슴치 않았다. 심지어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될 당시에는 줄리언이 아니라 스콧이라고 명할 정도였으니 그의 작심은 어느 정도 확고한 상태였었던 것 같다.
이야기의 마지막, 해리는 자신의 죽음을 홀연히 받아들인다. 죽음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고 그저 고통만을 안은 채,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거둬갈때, 킬리만자로의 높은 꼭대기를 바라보며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인간의 나태함
헤밍웨이는 스콧을 이야기를 통해 신랄하고 첨예하게 나태를 꼬집는다.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들 또한 그가 향한 대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디어를 얼마나 게으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 주변에 우리를 위한 것들이 널려있음에도 나태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남이 추월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어야만 할때가 많다. 과제 제출이 일주일 후라면 전날까지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것 또한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주변의 이야기들이다.
사실 소설에서 지적하는 협의를 모든 것에 대한 광의로 비춘다면 수많은 나태가 내 주변에 있음을 알게된다. 용모,관계,미래,건강 등등. 이를테면, 강도있게 나태함으로 스콧을 비판한 헤밍웨이 마저도 스스로 지키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인간적인 결함과 연결되기도 하는데, 그도 자신이 쓴 작품의 화살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어보인다. 하지만, 위 작품에서는 스콧의 창작의 게으름을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창작'이라는 협의에 대해서는 적어도 헤밍웨이는 면죄부를 받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작품이 써지지 않아 자살까지 시도할정도로 집필에 대해 열정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도 표면적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만 다뤄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나태하지 않음에 초점을 맞춘다면 모든 것에 나태해지거나 모든 것에 나태하지 않더라도 깊은 회의감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떠한 것에도 나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갖고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나태는 필연적이고도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언제나 항상 그것은 우리에게 종속되어 있어 그런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라는 종족이 그것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도전함으로 나태함은 우리를 되려 빛나게 해주는, 존엄성과 위대함을 발현시켜주는 기폭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스콧에게 아마도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태함을 극복하고 길고 길었던 터널을 지나 위대한 작가의 면모를 다시 세상에 전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리 또한 스콧에게 투영된 메시지를 통해 나태함을 지적당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지해야한다. 적어도 우리를 빛나게 할 수 있는 행위들에 대하여, 멋진 아이디어를 위하여, 나태하고 게으른 권태에 빠져있다면, 더욱이 아름답고 존엄한 인간으로서 나아가야 할 기회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