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를 읽고
굳이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세상을, 자연을, 우주를 그리고 어떤 소설 속에 있는 문장을. 어쩌면 우린 참 미련하다. 왜 꼭 다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해하지 않고 대화하고 받아들이면 안 될까?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만큼 끔찍한 재앙이 어디 있는가.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악함을 목격했을 때, 그를 품어주고 보듬어줄 다른 누군가가 없다면 그 세상은 얼마나 암울할까?
"이렇게 표현해 보자. 나는 강의실에서. 파티 때 건너편에서, 수많은 점심 식사 자리에서 EF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나의 친구였고,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존재와 모범 때문에 나의 뇌는 기어를 바꾸었고, 나는 자극을 받아 세계 이해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나는 그녀가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을 공책들을 읽었고, 그녀가 나에게 남긴 모든 책의 연필 자국을 살폈다. 하지만 아마 이 모든 만남과 대화, 그리고 그것에 대한 나의 기억 - 기억도 결국은 상상력의 기능 가운데 하나다 - 은 수사학의 비유와 같고 과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살아 있는 비유지만, 어쨌든 비유, 아마도 내가 엘리자베스 핀치를 '알고' 또 '이해하는' 것은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고 또 이해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깨달았으니, 멈출 때가 되었다." (우연을 결코 비켜가지 않는다 中, 줄리언 반스)
찰떡궁합처럼 잘 맞았던 사람도, 멀게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선생님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혹은 제삼자든 강하게 끌렸던 사람이라면 분명 그런 이유가 있었을 터, 하지만 그 이유가 사라지만 그 끌림도 동시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뭔가 변했다고 생각한다. 맞다. 변헀다.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극히 드물다.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만큼 많이 변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때 그 순간과는 모든 것이 달려졌다. 그때의 그 느낌은 우리의 마음속에 남은 잔상일 뿐이다. 매력을 잃어버리는 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래도 우린 늘 그리워한다. 옛날 같지 않다고? 모든 게 변하는 데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나.
아직도 우리의 옆을 지킨 이들은 변해가는 서로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며 함께 왔을 뿐이다. 서로가 변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게 아니다. 운도 우연도 우리를 변하게 만든다. 그게 더 나을 거라고 속삭이면서 말이다. 멀어진 이들을 종종 떠올려보라. 우리 기억의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테니. 만약 그 새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신도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식일 테니.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녀가 반쯤 지워버린 자취를 좇을 에너지나 관심이 나에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운이었다. 또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책'을 재구축할 시도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도 운이었다. 내가 그녀의 삶을 재구축할 시도를 하느냐 마느냐 - 그녀는 예상도 하지 못했을 텐데 -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우연이 자기 뜻대로 하게 놓아두는 것.
(중략)
이건 정당할 것이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이 일은 지금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고 따라서 내가 자유와 행복을 걷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우연을 결코 비켜가지 않는다 中, 줄리언 반스)
우연의 또 다른 이름은 변화다. 우연은 필요한 곳에서 일어나며 노력하는 자들에게 다가온다. 즉 변화가 있는 곳에 더 자주 출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