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고픈 계절이 왔다. 바람의 입김이 뜨거워졌다. 슬슬 여름이 오나 보다. 걷다 보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오늘은 이 여행기를 기필코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카페에 앉았다. 하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뭘 써야 할까. 지금 드는 느낌은,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쌓인 업무에 대한 근심, 회피하고 싶은 마음, 한 달 뒤 떠날 휴가 생각. 유난히 텅 빈 통장... 그런 것들이다.
요즘은 간단하게 떠오른 느낌만 담백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의무감에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잘못된 건 아니다. 그런데 왠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쓰지 않으면 찝찝하다고나 할까. 아직 떨쳐내지 못한 짐이 남아 있나 보다.
신혼여행의 막바지인 2025년 12월 31일, 그녀와 나는 다퉜다. 엄밀히 말하면 다툰 게 아니라 내가 그녀를 실망시켰다. 우리의 갈등은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만큼 특별한 날이었으니까. 로마 거리를 산책하고 풍경이 멋진 '조국의 제단'까지 오른 후 저녁을 먹으려 했다. 피자 얘기가 나와서 피잣집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괜찮은 음식점을 찾을 수 없었다. 연말이라 대부분의 음식점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어떤 피자집은 말일이라 30%의 수수료를 추가로 내야 한다고 했다. 앉아서 고민하던 나는 "너무 비싸니까 나가자"라고 했고, 계속된 방황에 그녀는 점점 지쳐갔다.
결국 우린 지나던 골목에 있는 한 음식점에 앉았다. 더 이상의 헤맬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아랍계로 보이는 종업원이 능글맞은 미소로 메뉴판을 내밀며 30유로나 되는 칵테일을 추천했다. 얄미웠다. "괜찮다"라고 하고. 일단 피자를 주문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켠 구글맵에 혹평이 가득했다. 지나친 호객 행위에 비해 맛도 없고 가격도 너무 비싸다는 불만들이었다.
먹는 내내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유난히 맛이 없었다. 도우를 꾸역꾸역 집어삼켰던 것과, 먹고 나니 해가 진 저녁이 되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약 40유로를 바닥에 내던진 기분이었다.
한 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갑자기 '지올리띠'라는 디저트 가게에서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조금은 기분이 풀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신혼여행에서 완벽할 수 있었던 휴일에 흠이 생겨버렸으니 말이다.
"미리 알아보았더라면 괜찮았을까?"
그녀에게 물었지만, 또 그건 아니라고 했다. 잊지 못할 추억 정도로 남겨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식당의 리뷰에 아주 세밀하게 평가를 남겼다. "우리 부부의 휴일을 망친 곳.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함에 감사" 정도로.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지금 떠올려 보면 그날의 기억이 가장 선명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때 느낀 감정이 강해서일까. 몇 년 전 그녀와 함께 떠난 다른 여행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방문한 카페에서 말이다. 그녀의 마음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때는 심각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일이 없었다면 그날을 이렇게 추억할 수 있을까.
*조국의 제단 : 로마 베네치아 광장에 서 있는 거대한 흰 대리석 기념관이다.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고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계단 위에는 무명용사를 추모하는 제단이 있다. 관광객에게는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는 전망대처럼 보이지만, 이탈리아인에게는 나라의 탄생과 희생을 기억하는 장소라고 한다.
*지올리띠(Giolitti) : 로마 판테온 근처, 비아 델리 우피치 델 비카리오(Via degli Uffici del Vicario)에 있는 오래된 젤라토·카페·디저트 가게다. 1890년 주세페 지올리띠와 베르나르디나 지올리띠가 시작한 가게로, 현재의 역사적인 매장은 1930년 나차레노 지올리띠가 열었다. 리조(쌀) 맛 젤라토가 아주 유명하다.
한 바탕 피자와의 전쟁을 치른 후, 새해 카운트다운을 기념하기 위해 거리를 나섰다. 분위기 좋은 바도 예약했다. (결국 가지는 못했다) 자정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지만 숙소에 있기는 아쉬웠다. 하지만 버티지 못했다. 저녁 9시쯤 숙소로 들어와, 자정 전에 일어나 인근 광장에 가자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그런 후 곧바로 쓰러져 잠에 들었다. 그리고 12시 01분경 폭죽 소리에 눈을 떴다. 호텔 창밖으로는 전쟁이 난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어이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본 채 다시 누웠다. 30분간 멈추지 않는 폭죽 소리를 들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로마의 휴일'이었다.
*포폴로 광장 : 포폴로 광장은 로마의 북쪽 관문처럼 서 있는 넓은 광장이다. 중앙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솟아 있고, 그 뒤로는 도시로 들어서는 문처럼 포폴로 문이 자리한다. 넓은 부지 뒤로 큰 성당 2개가 자리하고 있다. 밤에는 조명과 광장의 여백이 어우러져 로마 특유의 오래된 장엄함을 드러낸다.
이때를 생각하면, 나는 내가 여행의 초보여도 한 참 초보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 끝에 남는 건 무엇일까. 여행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뭘까. 그리고 "진정한 여행은 어떤 여행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행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아직 초보라는 얘기가 아닐까. 추억이 남았다면 그 여행은 이미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모르는데. 여행을 가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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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장 이력
현직 기자로 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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