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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Aug 07. 202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이재룡 옮김, 민음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밀란쿤데라
사진=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 밀란 쿤데라(91)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밀란쿤데라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밀란 쿤데라


사진=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9)' 캡처


인간에게 섹스(성관계)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거룩하고 무거운 행위임과 동시에, 인간의 유희적(쾌락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벼움의 극치다.


섹스가 화려한 겉치레라면, 그 화려한 겉치레 속에서도 개인의 느끼는 고독과 사랑에 대한 열망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밀란 쿤데라'가 말하고 싶었던 '삶의 가벼움'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가벼움과 무거움, 그 간극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삶은 무거울까, 가벼울까. 아무 걱정도 없는 듯 해맑게 웃는 유모차의 아기를 보면 삶의 무게가 덜어진다. (여기서 느끼는 가벼움은 마음의 짐이 덜해서 느껴지는 가벼움이다) 반면, 시청 광장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농성을 하는 뭇 시위대의 모습을 모면 삶의 무거움이 한 층 더해진다. 어느 한 쪽이 더 좋다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실로 우리의 삶은 수많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엉켜있는 실타래와 같다. 삶의 짐, 마음의 짐은 인간이 지고 가야 할 어쩔 수 없는 십자가인 걸까.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2 中, 밀란 쿤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끝이 아니라, 영원을 위한 새로운 약속이었다. 예수는, 온갖 화려한 것들로 치장했으나 썩어가는 육체 속 죽어가는 인간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당시 그는 유대교를 지배했던 지도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다. 예수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보였지만, 그의 가르침에는 참 사랑과 훗날을 위한 약속이 있었다.


종교적 가르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바라고자 합이다. 도시는 눈부신 네온과 화려한 겉치레의 끝에 와 있다. 지금 우리가 갈망하고 누리는 가벼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목적이 없어도 괜찮은가? 무분별한 훼손과 욕심으로 사라져가는 소중한 가치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2~3 中, 밀란 쿤데라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인간이 무엇을 갈망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각자가 살아온 삶 안에서만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삶에서 아직 만나지 못한 묵직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있다. 그것이 육체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더욱 더.


인간의 육체는 이미 오래전 한계를 만났다. 필자는, 왕년에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렸지만 나이가 들어 썩어진 몸과 굶주린 영혼으로 '죽음'을 마주한 이들을 자주 목격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영원한 사랑'을 만나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미화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이성을 가진 인간의 합리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 실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 '영원에 대한 갈망'을 못 박은 걸지도 모른다. 극 중에 등장하는 쿤데라의 자아는, 한 남성와 여인의 가볍고 무거운 일상을 넘어 존재의 이유를 갈망한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밀란 쿤데라

쿤데라는 독일 속담을 인용한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독일 속담)
사진=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9)' 캡처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통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55 中, 밀란 쿤데라


인간의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육체에 덜 불안해졌다. 또한 이제는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과학 전문용어에 가렸고 오늘날에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친 듯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71 中,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했다. "과학을 맹신하는 믿음이 모든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현대의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죽음과 병마 앞에서 무력하다. 과학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신을 찾으니까.


인간은 자연물을 모방해 창작을 한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자신이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누군가에게서 태어났기에, 인간이 가진 씨와 모태 안에서 한 생명이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만을 학습할 뿐이다.   



강하다는 것이 불쾌한 건 아니지만, 이런 근육이 제네바에서 무슨 쓸모가 있을까? 나는 이걸 장신구처럼 달고 다니는 거지. 공작 깃털인 셈이야. 나는 한 번도 누구를 때려 본 적이 없어." 사비나의 울적한 상념은 계속되었다. 만약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는 어떤 남자가 있다면? 누가 그녀를 지배하려 들었다면? 얼마 동안이나 그녀는 그것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채 오 분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는 적당치 않다. 강한 남자나 허약한 남자 모두.
“당신 힘을 가끔 내게 쓰지 않는 이유가 뭐야?”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프란츠가 부드럽게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87 中, 밀란 쿤데라


극중 프란츠가 한 말이 마음에 닿았다. 권위적 힘은 때로 '사랑'으로 둔갑해 사랑의 본질을 해치고 만다. 오늘날 수많은 권력이 남용한 힘의 무게는 수많은 약자들의 하중을 누르고 때론 그들을 불구로 만들어버린다. 인간의 가장 큰 모순은 더 큰 '힘'으로 큰 '힘'을 제압해야 한다는 엇나간 정의다. 더 큰 '권력'으로 큰 '권력'을 처단해야 한다는 분노, 하지만 더 큰 힘과 권력의 정의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거대한 권력으로 변질됐을 뿐.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203 中, 밀란 쿤데라



물론 지금까지 이런 의식은 없었고,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도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204 中, 밀란 쿤데라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의 본질을 잘 모른다. 필자 또한 그렇다. 그를 깨닫기 위해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야 한다. 각자의 마음 안에 숨 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찾아 나서고, 그를 얻기 위해 싸우고 견뎌야 한다.



변기 위에 앉았고 갑자기 창자를 비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치욕의 극단까지 가 보자는 욕망, 그저 육체, 오로지 육체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 어머니가 항상 말했듯 그저 먹고 싸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육체가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테레자는 그녀의 창자를 비웠고 그 순간 무한한 우수와 고독을 느꼈다. 하수관 끝 터진 주입구 위에 벗은 채로 앉아 있는 그녀의 육체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그녀의 영혼은 관람객의 호기심. 그 악의와 오만을 모두 상실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은폐된 육체의 심연까지 되돌아간 영혼은 누군가 다시 자기를 불러주길 절망적으로 기다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260 中, 밀란 쿤데라

치욕스러울 만큼 가벼운 일상에서도 '영혼의 심연'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게 인간이다. 싸고 먹기만 한다면 '인간'이라 부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론 싸고 먹는 행위가 필요 없고 전혀 중요치 않다는 말은 아니다.


밀란 쿤데라는 두 남녀의 가벼운 듯 무거운 애정 속에서, 육체의 미와 육체의 편안함만을 위해 살아가는 현 세대를 고찰하게 했다. '영혼의 심연'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영혼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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