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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Aug 19. 2020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를 읽고 1

언론-검찰-삼성 : 전직 기자의 비판과 고백

언론-검찰-삼성 : 전직 기자의 비판과 고백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 이소룡(가명)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 이소룡


▲삼성과 자본권력 "언론 위에 군림하다" 



뉴스타파는 한국 언론의 기이한 수입구조에 주목했다. 그중 하나가 기사를 가장한 광고다. 또 하나는 세금으로 조성된 정부의 홍보, 협찬 비다. 이 돈줄이 신뢰가 바닥에 추락해도 언론사가 연명하거나 배를 불리는 재원이 되고 있다. 


여기엔 약탈적 또는 읍소형 광고, 협찬 영업 태도가 도사리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가 타파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게 불가능하다. 


-뉴스타파, '언론사의 변종 돈벌이' 2020.1.15 中



기사와 광고를 맞바꾸는 것은 당연히 언론윤리에 어긋난다. 하지만 언론 현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거래다. 일단 보도했다가 광고를 받고 온라인에서 기사를 내리는 일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다. 당당한 기억도 있지만, 부끄러운 기억도 많다. 삼성을 별도의 장(章)으로 다루는 것은 그 특별한 위상 때문이다. 삼성과 언론의 관계는 기업과 언론의 관계를 평가하는 잣대다. 지표이고 상징이다.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 p185 中, 이소룡






저자는 00일보에서 근무하며 있었던 경험을 토대로 '삼성과 언론의 관계'를 주목한다. 단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1등 공신인 삼성, 삼성은 재벌기업이고 삼성이 가진 부는 모든 권력과 연관돼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삼성이 나라에 이바지하는 기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제에 큰 기여를 한다고 해서, 윤리적·도덕적 잣대까지 모두 경제 원리에 맞출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규모가 크고 유명한 기업일수록 그만큼 사회적 책임도 크다. 사회가 더 건강해지려면 부와 권력을 가진 재벌기업이 스스로 자사의 도덕·윤리성에 대한 자기 감시에 철저를 기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삼성은 엄청난 영향력을 동원해 언론뿐 아니라 국가기관에도 모두 손을 뻗치고 있다. 대통령은 임기가 있지만, 재벌 회장은 임기가 없다. 저자가 속한 00일보는 삼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때로 매출과 경영난을 극복하기도 한다. 삼성이 때마다 경영난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저자에 따르면, 삼성의 간부들은 소위 메이저라 불리는 언론사의 고위 간부들과 연락해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에 대한 광고 협상을 제안한다. 일종의 PR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일반적 PR이라고 하기엔 지나친 감이 있다.




Y지 기사가 나간 후 삼성이 00일보 고위층에 상당히 세게 항의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이어 언론을 담당하는 삼성 임원과 부장급 간부가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김 변호사 주장의 문제점을 설명하는 한편, 향후 협조를 부탁했다.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반박하지 않았다. "정말 열심히 하겠으니 지켜봐 달라"라는 그들의 호소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았다. 


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뒷날 간부가 된 뒤 당시 이메일에서 지적한 내용을 스스로 어기는 행동을 했다. 선배 기자들 또는 간부들의 전례를 따라, 광고주와 친분을 다진다는 명목으로 삼성 간부들과 밥을 먹고 더러 술도 마셨다. 골프도 했다. 대부분 그쪽에서 비용을 댔다. 기자 윤리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 中, 이소룡



삼성은 자사에 불리한 기사를 막기 위해 언론사에 막대한 광고금액을 제시한다. 자사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해당 기사를 막을 게 아니라 고치고 시정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 상식이다. 아니 이는 상식도 아니다. 하지만 삼성의 일부 간부들은 거래로 잘못된 점을 덮어버리려 한다. 더욱 안타까운 이런 삼성의 행태를 다수 언론사가 그냥 받아들이고 당연시 여긴다는 점이다. 


서로 Win-Win(윈윈)이라고 좋아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윈윈'이 아니라 '썩썩'이다. 같이 부패해가는 황천길이다  




H사 기사가 나가고 일주일쯤 지나 이번에는 삼성 기사를 실었다. 앞서 소개한, 이재용 부회장의 투신 발언을 다룬 기사였다. 나는 이 두 기사를 내보낸 이후 속된 말로 회사에 완전히 찍혔다. 나중에 Y의원에게 "선배, 나 망치려고 일부로 그런 기사를 발제한 거야?"라고 농담조로 항의하기도 했다. 


그해 말 인사에서 X일보 광고 업무를 총괄하던 사람이 상무로 승진해 출판편집인으로 부임했다. 그는 언론과 기업의 협조를 강조하면서 기업을 조지는 기사는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현실론인지, 신념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는 매거진X에 실린 H사 및 삼성 기사를 '나쁜 기사'의 대표 사례로 꼽았다. 취재가 부실하고 수준 낮은 기사라면서, 나는 한마디만 했다. "실을 만한 기사였다"고.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 中, 이소룡



이후 저자는 삼성을 포함한 몇몇 재벌기업과 부딪힌다. 저자의 유별난 정의감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것이 맞는데 세상이 이상한 건지. 답답할 노릇이다.


얼마 전 한 언론사 대표는 필자에게 "기업을 조지는 기사를 써야 한다. 그래야 훌륭한 기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왜 조져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경험이 부족해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책을 보며 대략 알 수 있었다. 


다만 의문점은 '조지는 것'의 목적이 무엇이느냐이다. 재벌권력에게 "당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으로도 숨길 수 없는 정의가 이 사회에 살아있다"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경고인지, 아니면 "한번 X돼 봐라(비속어)"는 엄포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언론이 제시할 수 있는 정의의 선은 어디까지일까. 아니면 언론은 정의를 논하면 안되는 걸까.


언론계에 암암리에 퍼진 접대와 청탁, 촌지에 대한 언급도 있다.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필자 또한 기자회견이나 유수 기업의 신제품 설명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기업들은 유난히 기자에게 선물과 식사를 챙겨준다. 물론 간단한 식사와 선물을 대접받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기자가 아니었어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취재를 하러 온 거지, 뭘 얻어먹으려고 온 건 아닌데 말이다. 




▲ 인간에 대한 예의 "떠나는 그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내가 미웠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다. 하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다. 둘째 단계는 옳은 것을 지키면서 해를 입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나쁜 것을 좇아서 이익을 얻을 때다.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는 나쁜 것을 좇아서 해를 보는 것이다.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中




엘시티 기사 소동이 벌어진 무렵 편집국장 및 출판국장 인사가 났다. 정치부장을 거친 편집국 부국장이 승진해 출판국장으로 부임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후인 12월 중순 신임 국장으로부터 취재 금지 지시를 받았다. 이유를 묻자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미디어그룹 차원의 결정이라는 것만 알아달라"고 했다. 나는 "기자들이 모인 조직에서 취재를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디지털 매출 전략을 위해서라도 힘 있는 취재기사가 필요하다"고 항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 中, 이소룡




저자가 데리고 온 프리랜서 C 기자가 기사 누락을 항의하다가 회사를 그만두는 사건이 발생한다. 해당 기사는 모 금융그룹의 영업 비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당시 C기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꼈다고 한다. 


조직 속에서 개인은 나약하다. 취재하는 기자도 다르지 않다. 경영논리 속에서 기자정신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합당한 비판은 때로 조직에 대한 공격으로 치부돼 심판의 단두대에 오른다. 그리고 당사자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언론사는 자사 기자가 취재한 기사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기자의 정신과 노력을 지키기 위해서. 언론의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 적어도 해당 기사가 거짓이나 허위로 작성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현 언론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졌다. 저자는 이제 언론사를 떠나 독립의 삶을 펼쳐나가겠지만, 이 책을 읽고 이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필자로선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저자에게 고맙다. 현실을 알려줬기에. 그리고 발을 깊게 들여 놓을지 아니면 떠나갈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옛 선조들은 글을 쓰며 정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글에 정신을 담았다. 기사가 세상을 담는 하나의 문(文)이라면, 그곳에 바르고 곧은 마음을 담아야 하지 않겠는가. 너무 거창한가? 


기자가 혼신을 담아 쓴 글을 보고 누군가 생각을 바꾼다면, 그리고 그 (생각의) 방향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한국 언론이 더욱 진실하고 투명해지기를 그리고 아름다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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