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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판사의 편견을 줄일 수 있을까?

- 가수들이 복면을 쓰고 노래하는 이유(복면가왕)

by 로도스로

○ “계급장 떼고 덤벼라”

어떻게 보면 "복면가왕"은 평범한 음악 경연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판정단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보면 다른 방송사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인 불후의 명곡(KBS), 판타스틱 듀오(SBS)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복면가왕"은 특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면가왕”이 여타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과 구별되는 차이점은 바로 가수들이 “복면”을 쓰고 노래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복면을 쓰더라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외모를 가리자 목소리가 드러난 것입니다.

“복면가왕” 제작진은 말합니다.


가수에게 계급장은 곧 인기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는 더 좋게 들린다. 곡이 유명가수를 만나야 인기를 얻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만약 인기라는 계급장을 떼고 진정한 노래 실력으로만 최고의 가수를 뽑는다면 누가 될까?
복면가왕 소개.jpg <출처: MBC 홈페이지>


‘미스터리 음악쇼’를 표방하고 있는 “복면가왕”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가 바로 ‘편견’입니다. 사회자인 김성주는 편견 없는 MC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많은 출연자들은 대중의 각종 편견을 깨기 위해 프로그램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편견을 극복하는 일은 뮤지션 혹은 연예인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라 법조인에게도 중요합니다. 법조인들은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 판사들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이유


직장에서 나와 집으로 귀가하던 A씨는 지나가던 행인 B씨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술에 잔뜩 취한 B씨가 다짜고짜 욕을 하기에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는데 적반하장으로 B씨가 달려들어 A씨를 때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경찰과 검찰은 “A씨가 나를 때렸다.”라고 주장하는 B씨의 말을 믿어주었고, 폭행 사건의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억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지만, ‘법원에 있는 현명한 판사님은 나의 억울함을 알아 줄 거야.’라고 생각하며, 첫 재판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판사는 인적사항을 몇 가지 확인하고 재판의 절차적인 부분에 대해서 설명할 뿐이었고, 검찰은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을 하는 겁니다. 눈치를 보아 하니, 판사는 사건의 내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상의 사례이긴 하지만, 첫 재판을 받으러 갔을 때 담당 판사가 사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건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판사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판사가 게으르거나 사건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첫 재판 때까지는 사건에 관련된 자세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지는 형사소송이 시작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형사소송은 검찰의 공소제기가 있어야 시작됩니다. 공소제기는 검사가 법원에 대해서 ‘피고인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이니 벌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는 절차로, 줄여서 ‘기소’라고 부릅니다. 공소제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검사뿐이고 검찰의 막강한 힘은 기소를 할 수 있는 권리(공소권)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소제기는 말로는 하는 게 아니라 서류로 합니다. “공소장”이라는 서류를 법원에 제출해야 하는데(형사소송법 제254조 제1항), 공소장에는 피고인이 누구인지, 피고인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하였는지, 피고인의 행위가 어떠한 법을 위반하였는지가 표시됩니다.


김용판 공소장_오마이뉴스.jpg 실제 공소장의 모습 <출처: 오마이뉴스>


검사가 공소장을 제출할 때 한 가지 지켜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검사는 공소장만 제출해야지 공소장 이외의 기타 다른 서류를 제출해서는 안 되는데(형사소송규칙 제118조 제2항), 이러한 원칙을 “공소장일본주의(公訴狀一本主意)”라고 부릅니다. 단어만 듣고 이웃나라 일본(日本)을 떠올리며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공소장일본주의”의 ‘일본(一本)은 공소장 하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웃나라 일본(日本)과는 무관합니다.

공소장에 범죄에 관한 대강의 내용이 나와 있으나, 자세한 내용이 구구절절 적혀 있지는 않으니 공소장만 받아본 판사로서는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할 수 있습니다.


○ 마음 속의 두 마리 나쁜 개

공소장일본주의라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편견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나쁜 개가 살고 있는데, 한 마리는 편견이고, 다른 한 마리는 선입견이다.”

가급적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해야 하는 건 재판의 맡고 있는 법관(판사)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태도입니다. 특히 피고인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리는 형사소송에서 편견을 배제할 필요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검찰이나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각종의 증거자료들을 모두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증거에는 당연히 피고인이 유죄라는 검찰의 주장에 부합하는 자료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피고인의 반박은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일방적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증거자료를 본다면 판사는 자신도 모르게 검찰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본격적인 재판을 하기도 전에 판사가 피고인에 대해 ‘당연히 유죄이겠거니...’ 하고 지레짐작을 한다면, 재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헌법 제27에서 규정하고 있는 무죄추정의 원칙(형사소송에서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도 지켜지지 않을 테고요.

즉, 재판을 통해서 검찰의 말과 피고인의 말 중 누구의 말이 진실에 부합하는지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편견과 선입견을 최소화시킬 필요성이 있어 공소장만 제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가수들로 하여금 복면을 쓰고 노래하게 하여 가수의 정체를 가림으로써 가수의 인기나 유명세 등의 요소에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목소리와 노래 실력만으로 노래를 평가하게 하는 “복면가왕”의 정신과 일맥상통합니다.


복면가왕 음악대장.jpg 20주간 가왕의 자리에 있었던 "음악대장" <출처: MBC 홈페이지>

○ 공소장일본주의의 내용

공소장일본주의의 근거규정인 형사소송규칙은 “법원에 예단이 생기게 할 수 있는 서류 기타 물건을 첨부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공소장일본주의의 위배 여부는 공소사실로 기재된 범죄의 유형과 내용 등에 비추어 볼 때에 공소장에 첨부 또는 인용된 서류 기타 물건의 내용, 그리고 법령이 요구하는 사항 이외에 공소장에 기재된 사실이 법관 또는 배심원에게 예단을 생기게 하여 법관 또는 배심원이 범죄사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당해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09. 10. 22. 선고 2009도7436 전원합의체 판결)


형사소송규칙과 대법원 판례는 모두 법관에게 예단(편견 혹은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는 서류 등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형사소송규칙과 대법원 판례 모두 일반론적인 원칙을 제시한 것이어서 구체적인 상황에서 공소장일본주의를 위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통해서 공소장일본주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홍길동(가명)은 A정당의 당원이자 지방자치단체 ○○시의 시장이고, 이몽룡(가명)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의 ○○시 선거구에 A정당의 후보로 출마한 사람입니다. 홍길동은 ‘○○산악회’의 제주도 한라산 등반행사에 이몽룡과 함께 참석하여 산악회 회원들에게 A정당 및 이몽룡을 지지하여 달라는 취지로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홍길동의 행위는 법에 위반된 행동입니다. 공직선거법상 선거에 의해 취임한 지방자치단체장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데, 홍길동은 이몽룡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검찰은 홍길동을 공직선거법 위반의 혐의로 기소하였습니다.

<출처: 공직선거관리위원회 포스트>

문제는 검찰이 기소할 때 사용한 공소장에 있었습니다. 공소장에는 범죄가 발생한 장소 및 시간, 선거운동이 금지되는 홍길동의 지위, 이몽룡의 지위와 A정당의 관계만을 기재해도 충분한데 지나치게 자세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 이몽룡의 선거사무실 개소식에 직접 참석하여 이몽룡에 대한 홍길동의 지지를 공공연하게 과시하였다는 내용, 홍길동이 A 정당 중앙당에 ○○시 선거구의 정당 후보자가 누구로 결정되든지 돕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A정당 소속 국회의원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는 내용 등을 포함하여 공소사실과 직접 상관없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검찰이 유죄의 증거로 제출한 녹취록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법원(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은 홍길동에 대한 공소장이 공소장일본주의에 위배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처럼 공소사실에 꼭 필요한 사항과 별다른 관련이 없음에도 지나치게 자세한 서술된 공소장은 “홍길동이 이 사건 공소사실 외에도 A정당 및 이몽룡을 위하여 금지된 선거운동을 하였거나 이몽룡의 선거운동을 지속적으로 도와주었다”라는 인상을 줄 수 있고, 결국 홍길동이 이 사건 공소사실도 충분히 저지를 수 있다는 강한 유죄의 심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서 법관에게 예단을 생기게 하여 법관이 범죄사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 공소장일본주의의 한계와 의미

가면을 써서 정체가 완전히 가려지는 바람에 가면을 벗었을 때 깜짝 놀란 만한 반전을 제공하는 경우도 많지만, 때로는 가면을 써도 정체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소리나 발성이 워낙 독특해서 단박에 알아내기도 하며, 특유의 행동이나 말투로 유추한 게 맞을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가수의 정체를 가리기 위한 가면이 완벽한 장치가 아니듯이, 공소장일본주의도 완벽한 제도는 아닙니다.

첫째, 공소장에는 본질적으로 범죄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이 기재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소장에 “A씨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라고 막연하게 쓸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적히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범죄를 저지르게 된 배경이나 의도와 같이 다소 부차적이지만 사건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내용도 어느 정도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결국에는 공소장 이외의 증거도 다 보게 됩니다. 첫 번째 재판에는 판사가 공소장만 받게 되지만, 그렇다고 판사가 공소장만으로 재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증거조사를 거쳐서 적법한 증거로 인정되면 검찰이 작성한 증거를 다 검토하게 되므로 공소장일본주의의 효과는 일시적입니다.

셋째, 공소장일본주의에 위반되더라도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공소장일본주의를 위반하면 법원은 “공소기각”의 판결을 합니다. 공소기각은 재판의 형식적 요건에 문제가 있거나 지켜야 할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을 때 내리는 판결로, 무죄 판결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래서 검찰은 절차를 제대로 지켜서 다시 기소할 수 있고, 실제로 홍길동도 2017년 7월 현재 다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편견_구글 이미지 겁색.jpg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이러한 공소장일본주의의 한계를 듣고 나면 다소 허탈한 느낌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소장일본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번 강조하는 바와 같이, 공소장일본주의의 목적은 편견을 최소화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어쩌면 공소장일본주의는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의 태도 혹은 자세에 대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검찰이 기소했으니 유죄인 게 맞겠지.”라고 지레짐작으로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로 재판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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