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명인간이 되지 않기
안기부 X 파일을 기억하시나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안기부에는 ‘미림’이라 불리는 비밀 도청팀이 있었습니다. 미림팀은 1994년 6월부터 1997년까지 활동하면서 정계, 관계, 재계, 언론계 등 주요 인물들의 통화를 도청을 하였습니다. 미림팀의 도청 파일 중에는 삼성그룹 회장의 비서실장이던 이학수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이 나눈 대화 내용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1997년 9월 경 대화를 나눴는데, 삼성이 검찰의 고위 간부들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걸 논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재계 1위 삼성의 2인자로 불리는 사람(이학수)과 유력 언론사의 사장이자 삼성 그룹 이건희 회장의 처남(홍석현)이 검사들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주면서 관리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주로 삼성이 명절에 이른바 ‘떡값’ 명목으로 돈을 줬다고 해서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의심을 받는 검사들을 ‘떡값검사’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노회찬 전 의원은 이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 전 의원은 2005. 8. 18. X파일에 등장하는 떡값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하는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명단을 게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검찰은 노 전 의원의 이러한 명단 공개가 위법이라며 기소를 제기했습니다. 문제 된 죄명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실명이 공개된 검사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공개한 행위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 1심 법원은 검찰의 주장이 맞다고 판단하여 노 전 의원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 하지만 2심 법원은 1심 법원과 의견이 달랐고 노 전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그런데 3심 법원은 다시 2심 법원의 결론을 뒤집고 유죄라고 판단하였습니다. 2심 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 합의부)과 3심 법원(대법원)이 그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명예훼손 부분에 대해 먼저 보면, 검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안기부 X파일의 녹취록을 보면 금품을 전달할 계획만 나와있을 뿐 그 검사가 실제로 삼성그룹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노회찬 전 의원은 검사가 돈을 받았다는 식으로 주장을 했으니, 허위의 사실로 검사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다.”
2심 법원은 허위사실인지에 대한 검사의 입증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녹취록을 보면, ‘회장께서 전에 지시한 거니까’, ‘작년에 3천 했는데, 올해는 2천만 하죠’, ‘연말에 또 하고’와 같은 대화 내용이 나오는데, 이런 걸 보면 삼성그룹이 검사에게 금품을 전달하는 게 과거에도 계속 이뤄져 왔고 나중에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전달 계획에 따라 그대로 전달이 되었을 것이라는 걸 쉽게 추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대화를 나눈 사람이 삼성그룹의 2인자와 삼성 그룹 회장의 처남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두 사람이 단순히 계획만 세운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눈 대로 실제로 금품을 검사에게 지급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계획만 세웠을 뿐이라는 검사의 주장은 지나치게 형식적인 논리에 치우진 느낌이 듭니다.
설령 검사의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계획과 실행은 다른 것이니 구분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검사는 수사를 통해 삼성그룹에서 검사에게 실제로 돈이 지급되었는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사장에 대해서는 전혀 수사를 하지 않은 겁니다. 두 사람은 법원의 재판 절차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녹취록을 보면 삼성그룹이 검사에게 실제로 돈을 줬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데도 검사가 이 부분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으니, “삼성그룹이 검사들에게 돈을 줬다.”라는 노 전 의원의 주장이 허위에 의한 명예훼손이라고 판단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다음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입니다. 검사는 비공개로 이뤄진 타인 간의 대화를 공개하는 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니 유죄라고 주장했지만, 2심 법원은 이 부분도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정확하게 말하면 ‘보도자료 배포에 대한 2심 법원의 결론은 ‘공소기각’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죄’와 동일함).
국회의원은 헌법에 따라 면책특권을 가집니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죠(헌법 제45조).
2심 법원은 보도자료를 배포한 노 전 의원의 행위는 면책특권의 대상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노 전 의원이 X파일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한 장소는 국회의원회관 건물 내였고, 보도자료는 노 전 의원이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말할 발언의 내용이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면책특권이 인정된다는 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니, 면책특권인 직무행위에 대해서 수사기관이 공소를 제기하는 건 불가능하고 처벌도 불가능합니다.
또한 인터넷 홈페이지에 명단을 공개한 행위 역시 ‘정당행위’에 해당하므로 죄가 아니라고 판단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3심 법원의 판단에서 보다 상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노 전 의원의 X파일 사건에서 문제 되는 행위는 2가지이고, 문제 된 죄명도 2가지입니다. 이에 대한 2심 법원과 3심 법원의 판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도자료를 배포한 게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2심 법원은 무죄, 3심 법원은 공소기각이라고 판단하여 엄밀히 말하면 구분이 되지만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니 실질적인 차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핵심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X파일을 게재한 행위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에 해당하는가?”였습니다.
2심 법원은 정당행위라는 이유로 무죄라고 판결했지만, 3심 법원은 정당행위가 아니어서 유죄라고 판단한 겁니다. 정당행위란 뭘까요? 정당행위는 형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형법 제20조(정당행위) 법령에 의한 행위 또는 업무로 인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
법에서 위반되는 행위를 하면 ‘위법’하므로 처벌되는 게 원칙이지만, 예외적으로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법함을 없애는 특별한 사정을 법에서는 ‘위법성 조각사유’라고 부르는데, ‘정당방위’가 위법성 조각사유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정당행위’도 위법성 조각사유의 일종인데, 법에서 허용한 행위, 정당한 업무로 인한 행위, 기타 사회 질서 전반에 비춰 봐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한 행위는 ‘정당행위’로 보아 처벌하지 않습니다.
X파일은 불법으로 감청, 녹음된 겁니다. 불법으로 감청, 녹음하는 행위 자체가 통신비밀보호법에 위반되지만, 통신비밀보호법은 감청된 내용을 공개하는 것 역시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예외적으로 공개가 가능한 경우를 제시하고 있는데, 예외가 적용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입장입니다(대법원 2011. 3. 17. 선고 2006도8839 전원합의체 판결).
첫째, 공개의 내용이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일 것
둘째, 공개하는 사람이 불법 감청·녹음 등의 결과물을 취득함에 있어 위법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적극적·주도적으로 관여하지 않을 것
셋째, 공개가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부분에 한정되는 등 통신비밀의 침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
넷째, 그 내용을 공개하여 얻는 이익 및 가치가 통신비밀의 보호에 의하여 달성되는 이익 및 가치를 초과할 것
그런데 3심 법원은 X파일의 내용이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대화를 한 시점으로부터 약 8년이 지난 시점에 공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 전 의원은 수사를 촉구할 목적으로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국회의원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굳이 X파일을 홈페이지에 게재하지 않고도 다른 방법으로도 수사 촉구를 할 수 있었다는 근거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서 X파일에 대해 상당히 알려졌는데 굳이 인터넷 홈페이지 게재라는 새로운 방식을 사용한 것은 너무 과하다는 것이 3심 법원의 주장입니다.
일면 수긍이 가면서도 의문은 남습니다. 특히 시간이 많이 지나서 X파일의 내용이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삼성은 우리나라 최대의 재벌입니다. 막강한 영향력과 힘을 가진 집단이죠. 그 집단의 2인자가 그 집단 1인자의 처남이자 유력 언론사 사장이 범죄에 관해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하는 막중한 역할을 하는 검찰에 돈을 주는 걸 계획하였는데, 그게 시간이 꽤 지났으니 ‘별 일 아닌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서 내용이 많이 알려졌으므로 굳이 홈페이지 게재까지 할 필요는 없었으니 정당행위가 아니라는 논리도 쉽게 수긍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언론을 통해서 X파일에 대한 내용이 대략적으로 공개되어 있었으므로 노 전 의원이 X파일을 홈페이지에 게재하더라도 추가적으로 입는 피해는 크지 않았다”라는 2심 법원의 판단이 더 타당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노 전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삼성 엑스파일을 공개하겠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부디 노 전 의원의 영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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