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껌벅이는 꽃사슴의 눈동자 / 검은족제비고사리

(54화) 넙치, 족제비, 꽃사슴, 꿈

by 로데우스


SOS 소리치는 몸
꽃사슴을 마주하니
오늘이 켜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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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요즘 통영도 추워졌단다. 작년 겨울도 춥더니 올해는 더 추워졌다고 한다. 내 몸이 느끼는 통영도 만만치 않은 추위이다. 어젯밤에는 아파트 스피커에서 수돗물 동파 방지를 위해 수도꼭지를 조금 틀어 물방울을 떨어트리라는 안내 방송도 있었다. 아침에 아내와 얘기 중 추위와 나이에 관해 얘기했다. 남쪽에서 지방살이를 오래 하다 보니 추위 적응력이 떨어졌고, 나이가 드니 움직임도 덜하다며 이런저런 세월의 덧없음을 공감했다. 그래도 할 일이 있으니 다행이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세먼지에도 자유롭지 못한 통영이다. 그러다보니 이래저래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오늘도 집에서 양치식물 스토리를 생각하는 느긋한 아침시간이다. 그때 전화 멜로디가 울려퍼진다. 반가운 목소리는 한국의 양치식물 3판이 나왔다며 주소를 보내달란다. 아! 그러고 보니 제주에서 양치식물을 찾던 수많은 추억이 아른거린다. 그 중 넙치를 닮은 고사리를 떠올렸다. 벌써 나의 양치식물 공부도 6년이 되었구나, 길다면 길지만 고수들에 비해 도토리 키만 한 짧은 기간이었는데 나의 드라마틱한 은퇴 후의 시간이 엄청난 기간처럼 밀려온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698715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11IA%2BnarMLvKsPY0HkLTPQ85oBw%3D 검은족제비고사리 군락


2023년 가을, 오름의 동굴에서 넙치를 닮은 고사리를 처음 보았었고, 그 당시는 미기록종이었다. 그 때 들었던 학명을 멜라노 카르파(melano carpa)로 기억하고 검색했더니 검은 열매를 뜻하는 아로니아가 줄줄이 나열되었다. 왜 이러지 하고 AI Gemini에 "양치식물(fern) 분야에서 melano carpa를 찾아줘"라고 부탁하니 "검은고사리(Dryopteris melanocarpa)라며 공부할 때의 Tip으로 검은고사리와 검은족제비고사리라는 국명이 혼용되기도 하므로 항상 학명인 Dryopteris melanocarpa를 기준으로 검색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라는 답을 보여주면서 유튜브로 안내했다.

유튜브를 보고 학명을 검색해서 "검은족제비고사리"는 2024년 1월에 정식 등록되었다는 글을 보았다. 성숙한 포자가 검은 색이라 이름지어졌고, 일본과 대만에서 자생하며, 대만 이름은 黑孢鱗毛蕨이었다. 이렇게 이미 이름을 얻은 검은족제비고사리를 나는 "사생아인가 왜 아직 이름이 없는가"를 떠올렸던 오늘 아침이었다. 학명 중 속명 Dryopteris를 잊고, 종명 melanocarpa를 Melano carpa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의 갭이 양치식물 분야에서 엄청나게 변하고 있었다. 내가 양치식물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희미한 눈을 껌벅일 때에 다른 누군가는 검은족제비고사리를 정식 등록하고, 블로그와 유튜브에 올린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한국의 양치식물 3판이 출간되며 추가 수록한 고사리들도 많다고 한다.


DSC02656.JPG 검은족제비고사리 잎몸


이런 세월의 저편에서 성산의 빛의벙커에서 보았던 영상처럼 검은족제비고사리가 헤엄쳐오는 상상에 빠진다. 넙치를 닮은 고사리를 처음 본 오름의 동굴 습지에서 고사리가 탄생하는 과정이 선명히 그려진다. 남쪽의 섬나라에서 바람에 실려온 포자가 제주의 오름 동굴에 안착하여 전엽체로 싹이 틀 확률은 복권 당첨보다도 더 어렵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신기한 인연인가? 전엽체에서 나온 정자가 다른 전엽체의 난자를 찾아가는 물길에서 부딪히는 난관을 뚫고 수정을 위해 헤엄치는 모습은 얼마나 절박했을까? 이런 고사리를 발견하고 세상에 알린 자의 설렘은 어땔을까? 이름이 붙히려고 유전자 검사를 하고 논문을 작성하여 등록한 자의 기쁨은 얼마나 클까? 그 인연들이 이어져 검은족제비고사라는 실체를 본다. 이름이 있는 존재가 어찌 위대하고 아름답지 않으리.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698715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3n%2FhOhsP2hBmyBOvxm%2B3oLISYuE%3D 검은족제비고사리 새순과 잎자루의 넓은 비늘


삭(蒴)을 찾기도 어려운 작디 작은 이끼들 속에도 수많은 생물들이 삶의 보금자리를 꾸민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생물다양성의 그림이 머리에 그려진다. 검은족제비고사리를 알아가는 나의 행동도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일부분이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이론이 필요 없는 그 자체의 삶이다. 자연을 좋아하는 내 삶이 내 자리다. 자연이란 거대함 속에 내 작은 흔적은 한 조각의 퍼즐을 맞추려는 시니어 몸부림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나의 행동에 주석 같다.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잡으며 오늘을 성실히 살고자 하는 절박감이 오늘을 사는 힘이다. 아픈 다리로 헉헉거리는 몸짓은 절규이며, 문득 떠오른 단상을 메모하는 머리는 정신을 차리라는 회초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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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기록종이었던 고사리가 "검은족제비고사리"라는 명찰을 달고 나에게 다가오며 속삭인다. "저의 이름이 없던 시절, 당신이 내 곁에 왔지요. 나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나의 가슴을 살포시 열어보며 포자낭을 확인하던 그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 후 다시 나를 찾지 않아 섭섭했는데 이렇게 나의 이름을 찾아 헤맨 줄은 몰랐습니다." 시력이 하소연하는 눈물 맺힌 나의 희미한 눈 속에 꽃사슴이 큰 눈을 뜨고 나를 응시한다. 넙치, 족제비, 꽃사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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