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섬은 나를 구속해도 좋다
다시 가고 싶은 그 섬
제주의 신비는 상상만으로도 몸을 떤다.
이 갈망의 끝이 다가오기를...
양치식물 이야기를 연재하는 통영의 시간은 어쩌면 지방살이의 전환점이 된 것 같다. 수술 다리의 경고성 시그널은 계속되고, 눈의 흐림은 안경의 도수에 불만을 표시하는데도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겨울이다. 건조한 통영에 볼거리가 없다는 것은 핑계인지도 모른다. 밖에 나가야 되는데 안에서 할 일이 있다 보니 엉덩이의 늘어짐에 제동을 걸 방법이 없다.
제주라는 보물섬에서 본 양치식물들의 기억이 저편으로 점점 멀어지는 안타까움이 시니어 눈에는 애석한 잔상이다. 붙들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아 제주를 그리는 마음이 짙어진다. 이곳에 가면 이 풀이 있고, 저 곳에 가면 저 꽃이 있다고 생각하는 제주는 나의 고향처럼 느껴진다. 아니 정말 고향 같다. 그곳에 가면 푸근한 마음이 들고 익숙한 기운이 스며드니 말이다. 그 섬, 그 제주에 가고 싶다.
통영에 와서 느낀 미진했던 것을 확인하고 싶은데, 곶자왈에서 본 섬나도히초미도 바로 그 미진함이다. 제주살이 중 1년이란 시간이 남은 시점에 섬나도히초미를 알았지만, 제주 마무리 일정은 올레길과 오름에 올인하였기에 두 번 본 섬나도히초미를 더 찾아갈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섬나도히초미의 어린 새순, 가장자리에 치우친 포막과 잎자루 하부 비늘조각의 2색성은 확인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섬나도히초미의 이색성 비늘을 뒤집어쓴 어린 새순이 반겨줄 것만 같은 상상이 눈앞에 현신하는 착각이다.
까뮈가 좋아했던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책 "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나의 은퇴 후의 삶을 대변하는 구절 같다. 제주살이 6년을 했으면서도 다시 그곳에서 가서 흙냄새를 맡으며 양치식물이나 이끼를 찾고 싶은 마음의 절절함을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주살이를 "대단하다. 멋진 삶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제주살이의 단점과 아열대성 습기는 생각지도 않는다. 아일러니 하게도 그러한 습기가 식물의 보물섬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 속의 나의 제주살이는 견딤, 고달픔, 위험이 도사린 야생의 탐사였다. 그것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몰입"일 것이다. "우리의 기분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갖고 있는 재주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재주"라는 글귀는 어떤 행동을 하든 몰입을 경험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 나의 행복은 야생의 탐사이다.
야생에서 본 식물에 내 시간을 쌓고 상상을 덧붙여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는 것이 나의 취미이다. 어쩌면 독특한 몰입을 경험하려는 시니어의 몸부림이자 갈망인지도 모른다. 제주(濟州), 탐라(耽羅), 영주(瀛洲), Quelpart(옛 유럽식 지명)란 이름의 제주도는 내 갈망의 구원점이다.
섬나도히초미(Polystichum longifrons)의 자생지는 극동지역의 섬인 일본과 우리나라의 가거도, 제주도이다. 섬나도히초미의 특징은 포자낭이 잎 가장자리에 치우쳐 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섬" 포스터의 희정의 눈동자는 섬나도히초미의 가면을 쓴 유혹처럼 매혹적이다. 제주도가 나를 구속해도 좋다. 갈 수만 있다면 날아가고픈 나의 안식처, 그 섬 속의 숲에 들어가 계곡물이 흐르는 곳의 신비를 또다시 맛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