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판도라 상자를 열다
곶자왈의 대형 단엽 고사리
순간적으로 밤일엽을 창일엽으로 착각
판도라상자 속의 샹그릴라
글을 쓰려는데 쓸 방향도 찾지 못하고, 내 블로그를 검색했지만 올려진 글이 없으니 그야말로 난관이다. 보통 세계적 분포지라면 서양에서 단서를 찾곤 했지만, 밤일엽은 동양에서만 자라서 글거리를 찾기가 어렵다. 양치식물이나 이끼에서 서양과 동양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나는 왜 서양의 시각을 찾곤 했는가? 동양의 도감적 설명보다 서양의 감상적 글이 더 마음에 닿았기 때문이다. 내 경험과 양치식물이 접합하려면 어떤 생각의 접착제가 필요한데 서로 각자 놀이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밤일엽은 제주의 서쪽에서, 창일엽은 제주의 동쪽에서 본 것이 동서양의 차이점일까? 밤일엽의 싱싱한 개체가 겨울을 뽐내듯 곶자왈의 풍경을 압도한다면, 창일엽은 가냘픈 잎사귀에 들러붙은 포자낭을 지는 해를 기둥삼이 촬영하던 순간의 희열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잎이 밤잎을 닮은 단엽이라 밤일엽이라는 어원도 있다. 그런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글의 방향은 어디로 향할까?
그러던 중 파일을 찾다가 판도라의 상자가 열였다. 낙상사고 3일 전 찬란했던 시간이 김밥 옆구리 터지듯 떠오르면서 곶자왈의 신비에 황홀했던 추억이 지느러미를 펼친 물고기의 유영처럼 힘찬 물길을 헤치며 다가온다. 아마도 이상향의 꿈을 꾼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지난 10월 신강여행에서 가이드에게 샹그릴라 여행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설산에서 진탕 고생하고 나서 좀 나은 풍경이 샹그릴라단다. 즉,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 한단다. 그렇다면 나의 판도라상자도 나의 샹그릴라였다.
그렇게 보고 싶고 가고 싶던 샹그릴라는 내가 이미 경험한 속에 있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엉겨 고생 고생하며 찾았던 그곳은 습기로 덮여 안경은 흐릿하고 귀한 양치식물이나 이끼도 몽환적 모습이었다. 카메라는 물방울이 맺혀 찍지 못했지만 경이로운 풍경에 황홀했던 시간이었다. 그 후 4년이란 시간이 만든 수레 바뀌 속에서 엄청난 변화가 나에게 닥쳤고, 헤쳐 나왔다. 늦게서야 핸드폰으로 겨우 촬영한 밤일엽 파일을 정리하면서 혹시 이것이 창일엽 아닐까? 생각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것은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을 닮았다.
서쪽에서 본 밤일엽과 동쪽에서 본 창일엽이 순간의 헷갈림으로 이미지가 혼합되어 녹색 세상은 흐릿한 안경 속에서 빛났다. 소설의 주인공 콘웨이는 "자기가 지금까지 미쳤다가 지금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잠시 제정신이었던 것이 다시 미친 상태로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라고 생각했듯이 나의 상그릴라는 나의 시간이 조우했던 이상향의 그림이었다.
동서양의 장점을 조합하며 그린 소설 속의 이상향 "상그릴라"는 이제 일반 명사가 되었고, 중국은 어떤 도시를 "상그릴라"로 개명하고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다. 현재의 세상은 미친 시간처럼 눈 돌아버릴 변화와 아귀다툼 같은 자국이기주의 사상이 기치를 올리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소시민이 품을 희망은 무엇일까?
밤일엽은 서부 곶자왈의 곳곳에 군락으로 살고 있어 곶자왈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고란초를 닮은 큰 잎에 놀라는 양치식물이다. 더군다나 상록성이어서 눈 속에서도 싱싱한 잎과 포자낭을 보여주는 모습은 곶자왈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 정도이다. 밤일엽은 제주의 서부 음습한 곶자왈이나 동굴의 입구에 군락으로 자란다.
그에 반해 창일엽은 보기 힘든 남방계 양치식물이다. 창일엽은 주로 나무줄기에 착생한다고 하는데, 내가 본 것은 바위에 착생하는 창일엽이었다. 바위에 노출된 뿌리줄기에는 비늘조각이 밀생하고 있었고, 잎줄기는 가늘며 좁은 날개가 있는 것에서 창일엽의 특징을 보았다. 이후 창일엽의 새순과 포자낭을 보려고 여러 번 창일엽을 찾았다. 나무줄기에서 자라는 창일엽을 보고 싶었으나 인연은 닿지 않았다.
인연이 필연이 되어 언젠가는 또 다른 상그릴라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이 긴 겨울의 한 줄기 빛이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힘이고, 엉덩이의 찰떡을 떼어내는 원동력이다. 그래, 움직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