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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테를 새긴다는 건

2024년 1월, 첫 번째 기록

by 이쥬쥬



어릴 적 나이테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왜 나무는 번거롭고 귀찮게 나이테를 새기곤 할까. 그냥 두꺼워지기만 하면 에너지도 아끼고 좋은 것 아니야? 이제는 과학 시간에 나무 형성층 세포분열의 속도 차로 나이테가 생긴다는 걸 배워버린 감성 없는 성인이 되었지만.



나는 학창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내성적이었지만 늘 친구가 있고 공부도 그럭저럭 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모범생의 끄트머리, 용의 꼬리, 한 학교에 열 명씩은 있을 법한 평범한 학생. 특목고에 진학해 인서울 대학까지 왔으니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 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학창 시절에 있었던 에피소드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명절처럼 1년에 두 번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우리 이런 일 있었잖아!’라며 깔깔거릴 때 혼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일쑤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억 상실증(?)의 이유를 알아차린 건 해가 바뀌면서였다. 2023년은 나에게 있어 터닝 포인트나 다름없는 해였다. 영어영문학과면서도 해외 체류 경험이 여행 일주일이었기에, 큰맘 먹고 미국 워싱턴 디씨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보낸 5개월은 단언컨대 인생 최고의 여유와 행복의 시간이었다. 귀국하자마자 국제기구와 협업하는 공공기관에서 반년 동안 인턴을 하며 국제 행사도 뛰고 해외 출장도 다녀왔다. 새내기 때부터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도 했다. 내 인생에 이렇게 이벤트가 많은 해는 처음이었기에,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 시간을 잊지 않을 것이라 자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모든 기억이 희미해졌다. 파견교에서 수업을 듣고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집에서 요리를 해 외국인 친구들과 파티를 벌이던 평범한 날은 생생한 영상이 아닌 한 줄의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머릿속에 남았다. 혼자 시애틀에 여행을 가 마약에 중독된 노숙자들에게 둘러싸였던 소름 끼치는 경험은 이야기가 아닌 두려운 감정만이 남았다. 인도네시아 출장을 간 김에 즐기겠다며 혼자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던 아침도 초점이 다 나간 사진으로만 남았다.



도대체 무엇이 원인일까, 단순히 뇌의 저장용량이 부족한 걸까? 고민 끝에 올해 초 내린 결론은 ‘기록의 부족’이었다. 지나가 버린 시간 속의 나는 타인이다.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중학생의 내가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친구 관계 고민은 취업 준비를 시작한 지금의 나에겐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이다. 오늘 버스 안에서 바라본 평범하고도 아름다웠던 노을을 이 년 후의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타인이 되어버릴 나는 그 무엇도 기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이제야 나는 나이테의 인문학적 존재 의의를 이해한다. 나이테가 없었다면 나무는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조금씩 다른 나이테의 굵기와 굴곡은 그 나무가 보낸 기간의 풍파를 담아낸다. 나의 시간을 글로 남겨두는 건 어쩌면 나이테를 새겨보려는 지금의 나의 발악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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