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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찬실이는 복도 많지

삶의 빈 공간이 아닌 채워진 것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by 혜영


좋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드디어 봤다. 주인공 찬실이는 영화 pd로 일하며 영화에 빠져 살다시피 했지만 어느 날 준비하던 영화의 감독이 갑자기(정말 갑자기) 죽어버려 일자리를 잃고 산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일에만 몰두하는 삶을 살다 돈도, 집도, 무엇하나 번듯하게 이뤄놓은 것도 없이 40살이 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찬실은 왜 지난날 그렇게 일만 하며 살았을까 후회하고 번민한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우울한 영화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영화의 시작부터 갑자기 감독이 죽어버리고, 끝도 없는 오르막에 위치한 찬실이네 산동네는 그저 우울하고, 찬실이가 처한 상황도 낙담 가득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찬실’이란 캐릭터가 가진 꽉 찬 명랑함이 영화를 감싸고 있어 보는 내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그런 영화였다.

찬실에겐 당장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영화판 어디에서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아 친한 여배우의 가사도우미 일을 하게 되는데 그 배우의 불어 과외선생님인 5살 연하남 ‘영’을 만나 호감을 느끼게 된다. 둘은 점차 가까워지게 되는데 둘의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영 : 전 크리스토퍼 놀란 좋아해요.
찬실 : 노올라아안??????

부산 출신인 찬실이는 영화 속에서 사투리를 쓰는데 부산이 고향인 나에게 가장 정감을 느끼게 한 저 굵직한 한마디의 대사, “노올라아안?????”이 너무 웃겼다. ㅋㅋㅋ 어렵고 난해하고 대중들은 대부분 지루함을 느끼는 예술영화를 만들어왔고 또 그런 영화를 좋아하는 찬실에게 자신은 이제 재미있는 영화가 좋다고,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영의 말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나 보다. 특유의 부산 사투리로 내뱉는 “노올라아안????”에서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귓가에 지금도 계속 맴돈다... 노올라아안???ㅋㅋㅋ)

‘찬실’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힘도 참 좋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힘들어하면서도 마냥 우울함에 빠지지 않고 일단 몸을 움직이는 그녀의 활기참이 좋았다. 가사도우미 일을 할 때 씩씩하게 걸레질을 하는 모습, 가파른 산동네를 힘차게 오르내리는 모습, 추운 날씨에도 늘 동네 공원을 산책하고,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거침없이 다가가는 모습까지.

그 모든 찬실의 ‘움직임’은 찬실 본인이 그동안 삶을 통해 쌓아 온 단단한 뿌리에서 나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본인은 40이 되도록 이뤄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탄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찬실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것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고 느꼈다.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청춘을 다 바쳤던 찬실은 앞으로도 영화를 계속하는 게 맞는지를 고민한다. 그 질문은 사는 게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영화에 삶을 걸었지만 의도치 않게 주어진 쉼의 기회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삶 안에 영화가 있음을 깨달은 찬실은 진짜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삶을 살기로 한다.

40살의 귀여움으로 무장한 명랑하고 따뜻한 ‘찬실’이 정말 복이 많다는 걸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되는 영화, 내 삶의 빈 공간보다 채워진 것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의문투성이인 삶이라 괴로웠는데 그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갈 여정이 내 삶을 꽉 채워줄 것임을 믿게 만드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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