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L Nov 21. 2021

그들의 상황도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유명한 사람들, 특히 왕이나 대통령처럼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평범한 우리와 달리 인생에 비단길만이 펼쳐진 줄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이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모든 것을 가진 멋진 남자처럼 보인다. 그의 아버지 조셉 케네디는 이십대에 이미 백만장자가 되었고, 그 덕에 케네디는 아버지의 재산만으로도 평생을 살고도 남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외조부는 보스턴의 명망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하버드를 졸업할 정도로 우수한 두뇌를 가졌고, 또한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기에 그를 만나는 모든 여성들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우수한 두뇌, 훤칠한 외모, 평생을 쓰고도 남을 아버지의 부, 외조부의 높은 명망 등으로 그는 쉽게 선거에서 이겼다. 하원의원으로 출마한 보스턴 지역은 케네디가 살아본 적도 없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상대 진영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어마어마한 선거자금을 투자해주었기 때문에 화려한 선전으로 상대 진영의 공격 정도는 묻히게 만들었다. 그는 1947년 1월 29세의 젊은 나이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1960년 43살의 젊은 나이로 최연소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케네디는 그런 사람이었다. 훤칠한 외모와 아버지의 부 덕분에 미국의 최연소 대통령이 된 사람. 부잣집 도련님으로 최고의 교육, 최상의 환경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잘 길러졌고, 가문의 엄청난 부와 사회적 영향력을 등에 업고 쉽사리 정계에 입문하여 승승장구 대통령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가 엄청난 고통 속에서 얼마나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했는지 알 수 있다.     

케네디가 부자 아버지를 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선택된 행운이듯, 어린 시절부터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힌 그의 질병 역시 자신도 모르게 선택된 불행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앓았던 질병은 기관지염, 수두, 풍진, 홍역, 볼거리, 성홍열, 백일해 등이었다. 그는 그 병들로 인해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냈으며, 겨우 학교를 다니다가도 병이 재발하여 학업을 그만두기 일쑤였다. 


투병 생활 중에 친구 빌링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질병들로부터 고통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이제 항상 복통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될 것이고 나의 내장들은 완전히 기능을 멈추어 버려서 내가 배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병원 사람들에게 나를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확 불어버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몸무게가 8파운드(약 3.6킬로그램)나 줄었고 여전히 줄고 있다.... 나는 병원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보여주고 있으나, 아무도 내 몸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그들이 하는 것은 고작 매우 흥미로운 경우라는 말만 뇌까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폭풍우에 휩싸여 살아온 내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경험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 앞에 있다는 것을 예측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어제 내 진료 차트를 잠깐 봤는데 그들이 나를 관속에 집어넣으려고 치수를 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생각에 록펠러 연구소가 내 병을 연구하지 않겠나 싶다.” 


병명도 알 수 없었던 그의 질병은 어린 케네디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 질병들은 이후로도 평생동안 그를 괴롭힌다. 안타깝게도 당시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투여된 부신 추출물은 이후 그의 척추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평생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무서운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는 목숨을 건 대수술을 감행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던 케네디에게 그런 치명적인 고통이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고통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너무나 성숙했다. 그가 친구 빌링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가 겪는 고통뿐만이 아니라, 그 힘든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보인다. 그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다. 관장을 위해 이발소 의자 같은 것에 머리를 박고 무릎을 꿇고 의사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며, 그 옆에 간호사들이 지켜보는 수치스러운 순간에도 케네디는 그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했다. 그는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늘 준비하고 있었기에 죽음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지에 초점을 두며 살았다.     



그의 삶이 불행한 것은 건강상의 이유만이 아니었다. 케네디 집안은 부친의 남다른 능력 덕분에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모든 면에서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고 있었지만 남모를 불운들이 많았다. 


케네디가의 첫 번째 불운은 잭 케네디의 바로 아래 여동생 로즈메리의 장애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발육상태가 비정상적이었다. 어머니 로즈는 로즈메리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그녀의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장애로 인해 점점 난폭해져가는 로즈메리를 치료하기 위해 뇌엽절리술을 강행하였는데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 로즈메리는 이전보다 더욱 난폭한 성격이 된 것이다. 결국 로즈메리는 위스콘신 주의 성 콜레타 수녀원으로 보내졌고, 평생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어린 잭 케네디가 자신의 건강상의 고통에 그나마 의연했던 것은 그녀의 여동생이 더욱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인 면도 있다. 개인의 아픔을 의연하게 견뎌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케네디가의 두 번째 다른 비극은 잭 케네디의 형이자 집안의 장남인 조셉 주니어의 죽음이었다. 조셉 주니어는 잭 케네디보다 두 살 위였고,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성장했다. 잭과 달리 조셉은 매우 건강했고 모든 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다니는 인재였고, 하버드 풋볼팀의 뛰어난 선수이고 럭비팀에서도 활약했으며, 신입생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더구나 그는 미남이었고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정치적 재능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는 한마디로 전도가 유망한 명문가의 후예였던 것이다. 부친 조셉은 일찍부터 장남인 조셉 주니어가 케네디 가문을 대표하여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조셉 주니어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함으로써 케네디 가문에 또 하나의 비극을 안겨준 것이다.


조셉 주니어의 죽음은 그의 가족 전체에게 끔찍한 상실감과 슬픔을 맛보게 했으며, 잭은 항상 함께 했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경쟁자를 잃은 것이었다. 또한 집안의 대들보가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둘째인 잭은 형에게 가있었던 집안의 큰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즉 크나큰 상실감, 외로움과 함께 막중한 책임감까지 더해졌던 것이다. 잭은 형을 추모하는 책에서 “만일 케네디가의 형제자매들이 현재 제구실을 하거나 앞으로 훌륭한 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조셉의 행동과 지속적인 본보기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전쟁은 케네디 가문에 또 다른 불행을 안겨주었는데 그것은 케네디 가의 둘째 딸 캐슬린의 남편 윌리엄의 전사였다. 조셉 주니어가 전사한지 겨우 한 달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캐슬린은 둘째 딸이었지만 장녀인 로즈메리가 장애였기 때문에 사실상 케네디 집안의 맏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가 결혼한 지 4개월 만에 남편을 잃은 것이다.     


전쟁의 상처로 인한 케네디 집안의 슬픔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가 큰 만큼 그것을 극복하려는 케네디 집안사람들의 의지도 강했다. 그들은 부유하지만 나약하지 말아야 하며, 경제적 부와 사회적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사회적 의무도 다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상실은 다른 미국인들처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결과였음을 인정하고 조속히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 케네디 가문 사람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을 잃은 캐슬린이 친구 빌링스에게 보낸 편지(1944년 11월 29일)에서 케네디 가문 사람들은 고통에 굴하지 않고 일어설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잭 역시 불행으로부터 회복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전쟁을 통해 세상의 보는 방식도 바꾸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7년 태어난 잭은 전쟁에 대해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평화를 위해 때때로 전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가 갖기 쉬운 관념이었고 인류 역사상 대규모 전쟁이 몇 십 년 간격으로 종종 일어나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전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숱한 죽음과 고통을 직접 목격한 잭은 이제 전쟁은 낭만적이거나 평화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즉 그는 전쟁이 가져다 준 인간의 고통과 비극을 경험하면서 전쟁이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값진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인간의 비극을 깨달음으로써 자기기만과 값싼 위로에 빠져들지 않는 더욱 강인한 정신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부유한 가문의 철딱서니 없는 젊은이에서 책임감이 있는 어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은 그냥 그대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부과된 건강상의 고통,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상실과 자신이 넘은 죽을 고비, 엄청난 인명피해와 파괴를 불러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참화 등 한 개인으로는 피할 수 없는 시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케네디의 상황이 나보다 나은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상황이었다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도. 인생의 중요한 일들이 상황에 의해서가 아닌 개인의 마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백만장자의 자식이 아닌 것도,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도 스스로 선택한 운명은 아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선택할지는 나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