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를 가득 메운 크고 작은 자동차는 네 바퀴를 마음껏 굴리지 못한다. 나아가고자 하는 이의 초조함은 경적으로 사방을 울리고, 그저 실려 가는 이는 달리 방도가 없어 하품만 쏟아낸다. 차창 밖으로 느릿느릿 연연한 봄의 색을 쏟아내는 평야 사이로 생뚱스레 가로수 무리가 열을 지어 서있다.
전라북도 고창의 선운산은 서쪽으로는 서해에 면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변산반도의 곰소, 줄포만을 마주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선운사 사적기(禪雲寺 事跡記)>의 도솔산(兜率山)이라는 이름보다 동쪽 자락에 자리한 사찰의 이름을 따라 선운산(禪雲山)으로 불린다.
선운산으로 널리 불리게 된 배경은 행정상의 명칭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전북대 토목공학과 김환기 명예교수는 1970년대 도립공원 지정을 앞두고 전라북도는 선운산의 주산을 내세워 '경수산(鏡水山) 도립공원'을, 선운사 스님들은 '도솔산 선운사 도립공원'을, 고창군은 선운사가 유명하니 '선운산 도립공원'을 주장했고, 결국 고창군의 제안이 채택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국토지리정보원에도 선운산으로 공식 표기되었다.
주차장은 선운산이거나 선운사를 향해 부지런히 바퀴를 굴려 이미 도착한 무리와 겨우 들어선 무리가 엉켜 왁자하다. 산과 숲을 눈앞에 두고 사람이 조성하고 숲이라 명명한 나무 무리와 그곳을 거니는 사람 무리를 지나, 무리 지은 사람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사찰 뒤로 난 평탄한 길로 들어선다. 길 양옆으로 키 큰 나무가 드리운 연둣빛 물결은 현상이자 이윽고 지날 찰나다. 습도가 낮은 봄의 더위는 화사한 나뭇잎 사이로 금세 실려 나간다.
평탄하게 멀리 뻗은 길 오른쪽에 단아한 건물 한 채가 서 있다. 잠깐의 구경값으로 이미 값을 치른 귀갓길 버스표 대신 멀리 둘러 갈 시간과 수고를 셈하는 동안, 마음의 동요와 현실의 계산과는 무관하다는 듯 몸은 스스럼없이 낯선 문지방을 넘어선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친일 행각에 가담하는 승려도 생겨났다. 경술국치 45일 만에 종권을 잡고 있던 이회광이 한일불교 병합 책동을 꾀하는데, 이때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1870 ~1948) 스님은 선방을 뛰어나와 그의 매종 행위를 규탄하고 저지하는 데 앞장선다.
그는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당대의 독립운동가, 문인, 고승들의 스승이자,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석학이며, 한시 600수를 남긴 시승(詩僧)이기도 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포함해 여러 학교와 강단에서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상해임시정부로 계승되는 한성임시정부의 13도 대표,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의 발기인 등 독립과 항일 운동에 참여하면서 안으로는 불교 개혁을 이끌었다. 길 한켠에 예사롭게 선 공간은 욕된 세월, 덕망과 영예를 쫓지 않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삶과 생들을 지킨 지금껏 알지 못했던 한 사람과 자꾸 잊히는 우리의 역사를 기억한다.
길 한켠의 석전기념관
산길을 목전에 둔 갈림길에서 다시금 오른쪽을 향한다. 도솔암은 선운사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다. 절의 이름이자 산의 이름이기도 한 '선운(禪雲)'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는 뜻이고, '도솔'은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미륵부처가 머무는 하늘나라인 도솔천(兜率天)에서 왔다. 도솔암 내원궁은 미륵부처가 아닌 지장보살을 모신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뒤 미륵부처의 출현까지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을 외는 염불은 목탁 소리를 따라 마애불이 굽어 보이는 산비탈까지 가닿는다. 깨달음과 구원을 향한 염원이 산 곳곳에 서려 있다.
변산의 서쪽, 툭 튀어나온 반도의 삼면은 바다와 강을 접하고,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 지대와 이어진다. 내부는 300개가 넘는 높고 낮은 산봉우리가 첩첩하다. 바다와 산, 평야가 어우러진 풍요의 공간이면서, 내몰린 자들의 은거처이기도 했다. 수백 군데의 사찰, 암자, 토굴이 있었다. 권력과 감시의 눈을 피해 숨어든 이들은 배를 타고 해안가를 따라 오갔다. 지금과 같은 길이 나기 전, 선운사의 자리는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서쪽만이 변산의 남쪽에서 이어진 해안으로 연결된 천혜의 요새였다.
백제 위덕왕 시절 검단 선사는 이곳에 살던 주민과 도적들에게 소금을 굽는 법을 알려주고, 산 아랫마을로 이주하도록 했다. 그렇게 확보한 터에 세운 절이 선운사라는 설화가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천일염이 들어오기 전까지 구워서 만들었던 소금은 더욱 귀했고, 이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게 된 사람들은 해마다 소나 말에 소금을 싣고 선운사에 시주했다. 천마봉에서 낙조대를 거쳐 소리재를 향하는 길은 보은염(報恩鹽)을 운반한 보은길과 만난다. 보은길은 풍천에서 선운서와 도솔암을 지나 서해 갯벌까지 이어진다.
길을 잘못 들어 가파른 산길을 수 분 내려가다 다시 오른다. 이대로 내려가면 앞서 단념한 버스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머리의 셈법은 발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기어이 오르니 변산과 산을 잇는 갯벌과 지척인 듯 먼바다의 섬이 서쪽으로 기우는 빛으로 물들었다.
1,5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사찰과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서 있는 산의 역사를 단 몇 시간의 걸음으로 알 리 만무하다. 다만 남겨진 기록을 뒤늦게 기웃거리며 거쳐온 세월과 풍파의 편린만을 설피 짐작해 볼 뿐이다. 살면서 무언가와 마주하는 일은 대체로 우연찮다.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않은 걸음에서 하나를 알게 되면 모르는 열 가지가 새롭게 떠오른다.
오르내리는 길에 다시 마주친 비구니는 찻잎을 나눠주었다. 난생처음 맛본 떫고 푸른 향은 오래도록 입안을 맴돌았다. 눈앞에 있는 선운사도, 추사의 비도 보지 못한 채 산을 나선다. 나는 많은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갈수록 아는 것이 없다.
+ 오늘도 줍기의 기록. 썩지도 않고 나무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리거나 바닥에 버려진 산악회 리본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