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이 깃든 산, 태백

유일사 입구로 들어 천제단과 망경대를 지나 문수봉에서 당골로 내려오다

by rh y

3월의 산에 남아 종종 무릎까지 오는 눈에도 봄이 스몄다. 나목(裸木)의 앙상한 가지 끝에는 엄동설한을 견딘 겨울눈이 새순을 키워내고, 작은 새와 동물이 산길 여기저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진다. 습하고 무거운 걸음마다 어느새 물러난 계절과 성큼 다가온 계절이 마주한다.


사람들은 산의 가장 높은 능선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세 개의 제단을 쌓았다. 유일사 입구에서 오르는 길은 북쪽의 장군단(將軍壇)을 지나 영봉의 천왕단(天王壇), 그리고 남쪽 아래 하단(下壇)으로 이어진다. 셋을 묶어 천제단(天祭壇)이라고도 하고, 셋 중 가장 크고 가운데 있는 천왕단을 천제단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로는 '한밝뫼', 즉 크게 밝은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신라 혹은 그 전부터 오래도록 신산(神山)으로 여겨져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장소였다. 경칩이 지난 장군단과 천왕단에는 여전히 간절한 이들이 하늘의 해를 가린 짙은 구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기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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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봉의 천왕단/천제단


천왕단에서 반재 방향으로 뻗은 내리막길에 기와지붕을 두른 비각이 하나 서 있다. 목조 삼칸 겹집의 팔작지붕 형식의 '단종 비각'은 1955년 한국전쟁 직후 세워졌다. 영봉 아래 터만 남은 망경대를 중창한 박묵암 스님과 신도들이 천제단으로 오르는 길목에 세운 것이다. 비각의 홍살 사이로, 당시 오대산 월정사 조실 탄허스님의 친필로 쓰여진 ‘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가 눈에 들어온다. 비문은 단종의 생애를 조명하기보다, 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구월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묘향산 중앙에 있는 태백산의 신령함과 그 산신이 된 단종을 기리는 내용을 담았다.


영월로 유배된 단종에게 머루와 다래 같은 산과(山果)를 진상한 추익한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추익한은 곤룡포와 익선관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동쪽을 향하는 단종을 만난다. 어디로 향하는지 묻자, 태백산으로 향한다고 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추익한은 급히 영월로 향했으나 이미 단종은 승하한 뒤였다. 그는 단종을 만났던 수라리재로 돌아와 절명했다.


추익한의 실제 관직이나 행적에 관한 오랜 기록은 희미하나, 추익한이 만난 단종의 혼백이 태백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믿음은 영월에서 태백에 이르는 곳곳에 깃들어있다. 단종의 영정을 모신 영모전, 단종 장릉의 원찰인 보덕사의 산신각, 이곳 태백산 망경대의 삼성각 등에는 추익한이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하는 '머루진상도'가 안치되어 있다. 수라리재를 비롯해 백마를 타고 영월에서 태백산을 향하며 지나고 쉬어갔다는 옛길 주변의 마을들은 단종을 마을의 주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매년 4월 말에 열리는 '단종문화제'는 1516년(중종 11년) 조정에서 처음 치제(致祭)를 올린 이래 숙종 24년(1698년) 단종 복위 후 약 270년간 제향(祭享)만 해오던 것을, 1967년부터 문화행사를 더해 개최한 '단종제'에서 이름과 시기를 조정해 지금에 이르렀다. 그밖에 해마다 한식날과 단종이 승하한 음력 10월 24일에 올리는 기신제나 수확한 머루와 다래를 진상하는 제례와 같은 추모 전통도 영월을 중심으로 전승됐다. 드문드문 기억되던 비운의 왕이자 17세 소년의 억울한 생과 죽음은 이제 많은 이들의 마음에 닿아, 눈꽃도 해도 없어 사람이 드문 산의 중턱에 자리한 비각 앞에도 오늘은 제법 여럿이 기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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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X_20260330_090216.jpg 단종비각과 망경대


천제단을 지나는 유순한 능선은 문수봉으로 이어진다. 높고 평탄한 지대에 큰 바위와 돌너덜로 이루어진 봉우리는 망경대와 천제단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이 문수봉이라 불리는 데는 신라의 고승 자장이 그리 불렀다고도 하고, 문수보살이 현현한 곳이라 그렇다고도 한다. 토산(土山)의 돌 봉우리는 빙하기를 거치며 만들어졌다고 하나 견고한 돌탑들의 근원은 알 수 없고, 다만 지혜와 복덕을 빌며 오가는 이들이 각자의 염원을 하나둘 쌓아 올린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너르고 유한 산은 하늘의 신(天神)과 나라의 시조 단군, 산신령(山神)이 된 어린 왕의 혼백, 지혜와 복덕의 문수보살을 두루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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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봉 돌탑들


소문수봉을 거쳐 제당골계곡을 따라 당골을 향한다. 당골(堂谷)은 당집(신당)이 있는 골짜기라는 데서 유래했다. 예부터 태백산의 신성(神聖)에 대한 믿음으로 산 주변의 골짜기를 따라 민간신앙을 믿는 이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당골을 이루던 당집들은 198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대부분 정리됐고, 소규모의 신당과 기도처만 몇 남았다.


산길의 끝과 당골광장을 잇는 길목에 철제 울타리가 들어서 있다. 국립공원 경계와 맞닿은 사유지의 피해를 호소하며 통행로를 차단하고, 출입 시 처벌을 경고한다. 오늘은 열려 있는 문 앞에 2차 경고문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 철문을 닫아 잠근 날도 있었다.


100m 남짓의 길은 도립공원 지정 전부터 등산로로 사용됐다.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매입하겠다는 제안은 금액 차이로 거절됐고, 산과 맞닿은 사유지를 통해 차익을 남기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과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울타리가 생기기 전 나는 이 자리에서 노랗고 빨갛게 물든 산을 돌아보며 꾸벅 인사하기도 했고, 능선을 따라 넘어가는 해를 한참 보고 서 있기도 했다.


당골에서 반재로 이어지는 당골계곡 길의 단군성전은 30년 넘게 무허가 건물이다. 문화재 복원과 공원 자원 조성을 위한 개발 계획에 따라 예산을 지원받아 개축했는데, 약속받은 땅의 소유권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무허가 건축물은 낡고 부서져도 고칠 수 없다. 자연생태계와 문화경관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한 국립공원은 육지를 기준으로 국토 총 면적의 약 4%에 불과하고, 해상을 포함해도 7%가 되지 않는다. 그 좁은 경계 안에서도 갈등이 잦다.


너르고 유한 산을 등지고 선, 아무도 없는 당골광장의 성황당은 굳게 닫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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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레기줍기 기록

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쓰레기,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자 기어이 나뭇가지에 매단 산악회 플라스틱 리본들. 물이 가득 찬 채 바위 틈에 버려진 큰 페트병은 문수봉에서 당골까지 내려오는 내내 꽁꽁 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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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줍고 치워서 깨끗한 길이라는 자각은 없고, 신령한 산에서도 사람들은 겁도 없이 쓰레기를 버린다.

PSX_20260324_222208.jpg 오늘도 감사합니다

참고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백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8921

2. 국가유산포털, 국가민속문화유산 - 태백산 천제단,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483202280000

3. 불광미디어, 태백산 산신이 된 단종, https://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020, 2021-11-24

4. 강원도민일보, [한반도의 허리 강원 백두대간 대탐사] 29. 민족영산 태백산, https://www.kado.net/news/curationView.html?idxno=1157080, 2022-11-30

5. 월간산, [어떻게 생각하세요?] 태백산 등산로 폐쇄…'사유재산이냐, 공익이냐', https://s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4103, 2024-10-04

6. KBS 뉴스, 30년째 무허가 건축물 ‘태백산 단군성전’,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44918,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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