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한계령을 올라 소청대피소와 봉정암을 거쳐 백담사로 내려오다
하늘을 가린 짙은 구름은 시선을 산으로 가둔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대신, 발길 끝에 닿은 산의 사정을 살피며 걸음을 옮긴다. 남쪽의 큰 산에는 한겨울이 되도록 눈 대신 비가 왔는데, 남한의 북동쪽에 위치한 이 산에는 다행히 눈이 쌓이고 녹기를 거듭했다. 1년을 기다린 산의 겨울은 점점 짧고 드물어진다.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을 지나, 하늘이 맑아지는 청명에 이르기까지 숱한 날을 아스팔트 길에서 보낸 작년은 고대하던 산의 겨울에 닿을 수 없었다. 생각의 조각을 언어로 이어 붙이기도 전에, 겨우 조립한 생각을 무너뜨리는 날들이 이어졌고,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던 나의 언어는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이내 떠오르기를 멈췄다. 언어에 담기지 못한 기억은 휘발되어 지금은 그 어느 곳에도 없다.
바람은 텅 빈 산으로 파도처럼 밀고 밀려와 땅 위에 선 존재를 세차게 흔든다. 곧게 자라지 못한 높은 지대의 나무는 휘어질지언정 꺾이지 않고, 차가운 바람이 부딪힌 곳마다 얼음꽃이 핀다. 가장 높은 봉우리로 이어진 이 능선에만 눈과 구름이 있을 뿐, 간혹 보이는 저 능선의 볕이 든 마른 땅은 멀리 바다까지 이어진다. 변하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수를 머금은 겨울바람은 더욱 깊고 세차다.
취사장에서 배를 채운 사람들이 대피소 안으로 하나둘 들어온다. 고단한 바깥 사정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거칠고 가식 없는 숨소리들이 이내 밤을 가득 채운다. 바람이 눈을 흩뿌리며 방금 지나온 옅은 발자국마저 부지런히 지워내는 이른 새벽, 해가 뜨기 한참 전에 떠나곤 했던 대피소에서 채비하다 말고 바닥에 다시 몸을 누인다.
누구도 들 수 없는 통제된 산길에서 내려갈 일만 남은 사람들의 아침은 수선하다. 기어이 가장 높은 봉우리를 들러 가장 가파른 길로 내려가려는 이들과 가파르고 완만한 길을 따라 내려가기만을 선택하는 이들로 나뉘는 와중에, 불이 붙지 않는 옆 버너를 대신해 물을 끓여주고 기왕이면 커피도 한 잔 끓여줬다가 간식이 가득 든 봉지를 건네받고 남은 귤 하나의 반쪽을 내민다. 저마다의 소용으로 배낭에 채워온 것들이 누군가의 소용으로 덜고 채워지는 사이 날이 밝아온다.
눈이 쌓인 길의 첫걸음은 그 깊이와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 발이 닿는 곳까지 조심스레 무게를 실어 딛고 빼내기를 거듭하는 동안, 두 눈은 부지런히 다음 디딜 곳을 탐색한다. 순간적이고 동시다발적인 몸의 작용에서 균형을 잃으면, 발끝의 얼음에 갑자기 미끄러지거나 부지불식간에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힘겹게 발자국을 내며 나아가버리고 만다. 장갑을 겹으로 둘러도 시리던 손끝까지 열이 올라 길가에서 여장을 정리하는 동안 뒤따라온 산객 셋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아가는 길은 수고로움이 적다.
눈보라가 몰아쳤다 해가 뜨기를 반복하던 산길의 끝에서 해가 천천히 저문다. 어느 해의 겨울에는 이 길을 따라 오르고, 어느 해의 여름에는 이 길을 따라 내려갔다. 어느 해의 겨울, 예정한 길이 막혀 이 길로 되돌아 나오는 초행길의 초조한 발걸음을, 마주 오던 스님은 차분히 불러세웠다. 제 속도로 가나 급히 가나 1시간 남짓의 차이라던 그의 말은 오늘 눈을 헤치고 내려온 가파른 고개를 오르게 했고, 늦더라도 조심히 오라는 대피소 직원의 말은 걸음마다 힘겹게 숨을 몰아내던 나에게 심호흡이 되었다. 거듭 찾은 길 위에서 보고 듣고 기억되는 것은 언제고 예측할 수 없고, 우연히 마주한 낯선 이의 어떤 말은 사람을 돕고 살린다.
사람과 사람인 척하는 기계가 쉼 없이 쏟아내는 타자의 말 속에 나의 서툰 언어로 느리게 쓰고 남기는 일의 쓸모는 매몰되고, 시시각각 시선과 주의를 빼앗는 의미와 쓸모를 알 수 없는 말은 나를 살리고 일으킨 기억과 언어를 몰아낸다. 바람과 눈에 온몸을 휘청대며 누구도 보지 못하는 웃음을 짓고 있는 겨울 산에서야, 순간을 기억하고 써 내려가는 무용한 수고의 쓸모를 다시금 겨우 떠올린다.
종잡을 수 없는 날의 사정으로 버스가 다니지 않는 아스팔트 길에서 스님이 나를 불러세운다. 큰 가방을 메고 터벅터벅 걷는 낯선 이의 행색이 그는 안쓰럽고 딱하다. 그저 지나칠 수 있었던 이를 돌아봐 준 덕에, 좋은 날 다시 찾기로 한 장소와 언젠가 반갑게 인사하고픈 길 위의 인연이 늘어 오늘도 복되다.
+ 쓰레기줍기 기록
국립공원에서는 안전을 위해 탐방로의 시야가 미치는 범위 곳곳에 표식을 설치해 뒀다. 그 옆으로, 사이로 빈 가지를 찾아 썩지도 않는 형형색색의 등산리본이 여기저기 흉측하다.
국립공원 내 산악회나 개인의 등산리본 설치는 허용되지 않는다. 등산리본을 설치하는 행위는 쓰레기 투기 및 자연생태계와 자연경관의 보전관리에 현저한 장애가 되는 행위에 해당해 과태료처분의 대상이 된다(자연공원법 27조 1항 11호, 29조 1항, 86조 1항 6호, 86조 3항 및 같은 법 시행령 26조 7호)*
도무지 지나칠 수 없어 떼고 주운 쓰레기만 한 봉지 가득이다. 제발 산에 조용히, 흔적 없이 들렀다 갑시다.
*참고/출처: 월간산 https://s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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