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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18. 2023

이불킥을 방지하는, 거절의 지혜

나를 지키는 똑똑한 거절

   배려심 많은 나의 한 친구는 누구에게나 상냥하다. 번호가 언제 어디서 뚫렸는지 보험회사며 통신사며 여기저기서 가입 권유 전화가 걸려온다. 친구는 그런 전화에도 예외가 없다. 상냥한 태도로 전화를 한참 받길래 '너 그거 할 거야?'하고 입모양으로 물어보니 친구가 말한다. '아니, 끊기가 미안해서.'


   '거절'이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어감 때문일까. 거절을 하면 왠지 나쁜 일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불편감이 있다. 하지만 거절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그저 의사표현의 하나일 뿐이다. 텔레마케터들의 음성은 늘 친절하다. 출근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게 싫어서 일요일부터 축축 처지는 보통의 직장인들과 달리 그들은 어쩜 그렇게 친절할까. 그들의 친절함의 원천은 실적이다. 그들은 권유에 응해 가입할 고객님들을 찾기 위해 친절을 발휘한다. 상품에 가입할 생각이 없다면 어서 전화를 끊어주는 게 서로 유익하다. 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서 좋고, 그분들도 그 시간에 다른 전화를 더 해볼 수 있으니까. YES보다 NO가 필요한 거절의 순간들은 얼마든지 있다.




   거절은 나의 바운더리를 알리는 방법이다. 나는 여기까지는 허용할 수 있지만 이 이상은 곤란하다는, 나의 바운더리를 알리려면 거절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누가 그러더라. 동창회에 1시간 갔다 오면 동창회에서 나눈 이야기 곱씹는 시간이 2시간이라고. 우리는 때때로 감정의 숙제를 집까지 가지고 온다.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숙제가 끝나지 않으면 이불킥을 한다. 때로는 열받아서, 때로는 억울해서, 때로는 약 올라서, 때로는 이런 나 자신이 불쌍해서. 거절할 건 거절하면서 할 말 하고 사는 방법을 익혀보자. 그때그때 거절하면 감정의 숙제 없이 편안하게 이부자리에 들 수 있다.


1단계. 인식하기

  거절의 첫 번째 단계는 인식이다. 인터넷에 보면 이런 제목의 글이 많다. '저 @@한 일이 있었는데 이거 화나는 일 맞죠?'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그 순간에 어버버 하다가 타이밍을 놓친다. 자기 바운더리가 희미한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이 있다. '왜 자꾸 그 장면이 생각나지?', '왜 자꾸 기분이 나쁘지?' 이런 의문을 자아내는 장면에 주목하자. 내가 소심해서, 내가 너그럽지 못해서 이런 일에 기분 나빠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바운더리는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다. 다른 것보다 시간 약속은 꼭 지켜줬으면 하는 사람도 있고, 일은 좀 못해도 되지만 예의는 꼭 차려줬으면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일로 기분이 상한 나에게, 너는 왜 그런 일로 기분이 상하냐고 나까지 질책하지는 말자.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에게 기분이 나빴다는 정보를 차곡차곡 모으면 내가 무엇에 예민한지 무엇에 관대한지 알 수 있다.


2단계. 웃지 않기

  내가 어떤 사람에게 어떤 포인트에서 기분이 나빴는지를 인식했으면 그다음 단계는 대응이다. 들장미소녀 캔디 마냥 외로워도 슬퍼도 미소 띤 얼굴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갑자기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처음부터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보다 그저 '웃지 않기'를 시전 해보라. 직장상사의 짓궂은 농담에 애써 하하하 웃지 말라.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서, 혹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웃고 있었을지 몰라도 직장상사와 다른 팀원들은 '이 사람은 여기까지 해도 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분이 나쁠 때는 웃지 말라. 웃지만 않아도 자기 스스로 민망서 깨갱하는 사람도 많다.


3단계. 가벼운 응수

  어떤 사람으로 인해 기분이 나쁜데도 억지로 기분 좋은 척 꾸미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다음 단계로 이행할 준비가 됐다. 다음 단계는 가벼운 쨉을 날리는 단계다. 경험상 가벼운 쨉만 잘 날려도 바운더리를 침 문제 대부분이 해결된다. 가벼운 농담이나 감탄사 정도를 날리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포인트는 짧고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 일이 많은 걸 알면서도 또 나에게 일을 배정하는 사람에게는 '헐!'이라고 말해주자. 정시에 퇴근하는 나에게 벌써 가냐고 얘기하는 사람에겐 '네~ 내일 봬요.'라고 말하자. 때가 어느 때인데 여자라는 이유로 옆에서 술을 따라달라고 얘기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 있으면, '어머, 꼰대세요?' 라며 호호 웃자. 직장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위해 만난 장소가 아니던가.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처럼 애정에 기반한 관계가 아닌 직장관계에서는 더더욱 무의식적인 우위가 작용한다. 나보다 직급은 낮은데 어딘가 만만하지 않은 사람, 왠지 예의를 차려서 말해주어야 할 것 같은 사람. 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진 사람이 되자. 가벼운 응수만 잘해도 결코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4단계. 진지한 응수

  가벼운 응수를 했는데도 계속 내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따로 둘이서 진지하게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다. 상대방이 그래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받아들이고 사과를 하거나, 적어도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해서 행동할 것이다. 변명이나 너스레로 슬쩍 피해 가려고 하더라도 나이스한 태도로 한번 더 굳혀 말해준다. '다 지난 일인데 뭘 그러냐.'라는 반응에는 지난 일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건 많이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니가 예민한 거야.'라는 반응이라면 '저는 그 부분은 예민합니다.'라고 말하자. 상식적인 사람이 아닐 경우 진지한 응수를 해 봐야 의미 없을 것 같은 때도 있다. 하지만 나에 대한 태도가 너무나 무례하고 부당하다면, 혹여 클린하게 해결되지 않을지라도 경고의 의미에서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다.


5단계. 손절

  친구라면 애써 이 단계까지 올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만날 때마다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과 굳이 친구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으니까. 모든 방법을 다 썼는데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는 손절할 수 있다. 직장이라면 퇴사가 될 것이다. 가끔 1단계 인식하기를 거친 후 바로 5단계 손절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기분 나쁜 일이 있는데 말 한마디 해보지도 않고 스스로 퇴사하 경우다. 어차피 나갈 건데 굳이 서로 얼굴 붉힐 것 있냐면서 혼자만 끙끙대지 말고, 어차피 안 볼 사람이니까 사람공부한다 생각하고 한 번 물어보는 것도 괜찮다. 어떤 사람 때문에 힘든데 혼자 끙끙대는 사람이라면 어느 직장에 가든 또 비슷한 사람들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손절할 거라면 가볍게라도 내 생각을, 기분을 표현해 보자.




   나의 대학친구 중 한 명은 소위 말하는 싸가지가 없는 놈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스무살 무렵에는 싸가지가 바가지였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틱틱 말하고, 자기가 좀 좋다 싶으면 헤헤거리고. 걔는 꼭 밥을 먹고 나면 껌을 씹었다. 집에 돈도 많은 놈이 껌 좀 달라고 하면 반을 접어서 주고 아주 치사빤스였다. 무튼 그런 녀석에겐 신기하게도 날이 갈수록 사람이 붙었다. 처음엔 다 걔를 욕했는데. 선배들도 친구들도 걔를 좋아했다. 물론 나도 그 녀석과 친했다. 나도 참지않고 말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대놓고 욕했다. 그러면서도 걔랑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하는 그 녀석이 나를 칭찬했을 때, 나는 안심하고 순도100퍼센트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싸가지는 좀 없어도 진정성은 있는 녀석이었다. 분명 싹수없게 말하는데 말할 때 왠지 정이 느껴지는 이상한 녀석.


   순간순간 자기감정에 솔직해지자. 감정의 숙제를 이부자리까지 가지고 오지 말자. 거절이라고 하면 당장에 싸움이나 손절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거절하고도, 표현하고도 얼마든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정말로 편안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오히려 거절해야만 하고 표현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으로 인해 기분이 상했다면 내가 어떤 지점에서 기분이 나빴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자. 그 순간에 바로 캐치가 안되었더라도 아쉬워말자. 곧 다음 순간이 또 온다. 그런 순간이 또 왔을 때 웃지 않는다든가 가볍게 응수한다든가 하는 대응을 해보자. 하면 할수록 잘된다. 내 쪽에서 놓아버리면 언제라도 멀어질 사이에 너무 마음 쓰지 말자. 작은 거절을 하지 못해 참고 참다가 결국 손절을 해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많다. 스무 살 내 친구처럼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적나라하게 말하긴 좀 그런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우리는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해야만 한다.


오늘도 표현하고, 오늘도 이불킥 없이 편안하게 잠들자.


ⓒbeeboys, 출처 adobe 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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